만남 우정
Quadruple Bypass Open Heart Surgery (사중 개심술 심장 우회 수술)에서 오늘의 원상복귀까지
시리즈 # 2 out of 5 “ “나의 둘도 없는 친구 ‘라니’를 소개합니다”
(제 1번)
<들어가면서>
‘야누스의 얼굴’ 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영어에서 1월을 뜻하는 재뉴어리(January)에서 유래한 것인데 통상적으로 '야누스'는 ‘두 얼굴’ ‘이중적인’ 혹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빗대어 가리키는 수식어로 왠지 꺼림직하고 불쾌한 기운을 감돌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가 내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지만 내 뒤에 가서는 뒤통수를 치는 이중성격의 ‘위선자’라는 표현을 좋아하겠나?
살면서 보니 뭐니 뭐니 해도 내가 만난 가장 뻔뻔하고 섬찟한 ‘두얼굴’ ‘겉 다르고 속이 다른 ‘삼중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있는데 다름 아니라 바로 시간이고 세월이라는 놈이더라. 그래서 일찍이 F. 실러라는 사람은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간의 걸음걸이에는 세 가지가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 ” 즉 세월이라는 놈은 두 얼굴도 모자라서 이제는 세 얼굴 (주저, 날아가고, 정지) 을 하고 있다.
정말이지 ‘세 얼굴’ 또 ‘삼중적인’ 성격을 가진 시간 그리고 세월이라는 놈을 다루는 것이 여간 버겁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영 도대체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천하에 더 이상의 가증스러운 놈이 없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쁠 때는 내 손에 있는 시간이 화살처럼 훅 날아가 버린다.
눈을 뜨면 아침이고 돌아서면 저녁이고. 월요일인가 하면. 벌써 주말이고 월초인가 하면 어느새 월 말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흘러가는 세월을 빗대어 ‘낙화유수 (흐르는 물에 떨어지는 꽃)’, ‘ 백구과극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다)’, 또 ‘광음여전 (세월의 흐름은 화살과 같이 빠르다)’같은 고사성어가 일상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야누스에게는 또 다른 얼굴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론 시간이 너무 느려 터져서 우리의 속과 애간장을 태우곤 한다.
흔히들 이 세상에서 가장 느려터진 ‘웬수’ 같은 것이 국방부 시계라고 하지만 내 집 벽시계는 느려터짐에 관해서는 국방부 시계는 저리 가라 할 것만 같다. 요즘에는 도대체가 나의 시간과 세월이 제자리걸음을 하다가 이제는 아예 멈추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어릴 때 자려고 드러누웠는데 잠은 안 오고 시간이 느리고 지루하게 흘러갔던 악몽 같은 또 그 옛날 학창 시절 점심시간 후 나른함이 나를 엄습할 때면 왜 그렇게도 수업시간은 길게만 느껴졌는지 또 왜 그렇게도 시간은 꾸물꾸물 되곤 하든지. 그때나 지금이나 시간의 폭군이 그 기질을 조금도 죽이지 않고 여실히 그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낼 때면 예나 지금이나 혀를 내 두르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두 손을 번쩍 들곤 할 뿐이다.
<라니의 방문>
지금까지 살면서 내 삶에서 시간이 가장 느려터지는 것 같이 느꼈던 바로 그럴 때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해 귀가한지 2주쯤이 지났을 때이었다. 그러니까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재활에 매진하고 있을 때이었다. 어느 주일 아침에 백발노인 ‘라니’ 부부가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내가 사는 콘도를 방문했다. 추억의 노래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차곡차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라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가사가 내 이상의 콧노래가 되었고 내 삶의 넋두리가 되었던 순간이다.
단번에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본 ‘라니’의 얼굴 표정이 어그러지고 찌푸러졌었다. 아마도 너무나 뜻밖의 친구의 모습에 혼비백산, 동공 지진 모습이었다. 스스로 몸을 온전히 가누지 못하고 구부러진 허리, 또 창백해진 얼굴 모습 그리고 수술 후 확연하게 달라진 나의 쉰 목소리에 ‘라니’가 어렵지 않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쯤에서 이 백발노인네 친구 ‘라니’와 나의 관계의 시작과 배경을 설명하는 것이 내 글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것 같다.
<동네 한바퀴>
나에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지고 있었던 습관이 있었는데 바로 걷기 운동이다. 별 준비 없이 또 별다른 경비의 부담 없이 혼자서 어디서나 늘 항상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이점 덕택에 빠진 습관이다. 또 조부모 그리고 아버지가 지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어릴 적부터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자란 덕택에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며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다.”라는 옛 격언의 말씀은 내 뇌리에 깊게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20 중반의 한창일 나이에도 어딜 가나 늘 건강 챙기는 일은 항상 내 일상의 우선순위 0번이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서도 ‘집 떠나서 아프면 안스럽다’라는 생각이 날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걷는 습관에 가속도가 붙자 새로 이사 온 지금의 실버타운에서도 초지일관 하늘이 두 조각이 난다고 해도 나의 걷는 일상은 계속되었고 이사 온 첫날부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새벽을 깨우고 일어나 정상적인 성인의 걸음걸이로 대략 35분이 걸리는 거리의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 거주자들의 평균연령이 78이니 동네 한 바퀴는 그야말로 쓸쓸하고 적막하고 적적하기 짝이 없다 특별히 새벽시간에는 황량함과 적막함이 극도에 이른다.
<한 이웃의 고독사>
쌀쌀하고 스산한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이 절정인 10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그날따라 나의 새벽의 동네 한 바퀴의 나섬, 스산함, 황량함 그리고 외로움을 극대화할 심상인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속상한 아내의 원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나의 동네 한 바퀴 걷기에 나섰다. 이 실버타운에서 가장 고가의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단독주택들 앞을 지날 때이었다.
이사 온 지 1년 차가 되면서 이제는 대충 누가 어떤 집에 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는데 특별히 새벽의 동네 한 바퀴 선상에서 거의 매일 같은 시간에 나와 눈이 마주치곤 한 백인 노인이 있었다. 그 역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가 그 집 앞을 지날 때면 그 역시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여 대문을 열고 나와서는 낯선 동양인에게 손을 흔들곤 한 참 고마운 노인이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던 모습에 조금 경계의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이제는 전혀 그런 기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반가운 이웃을 대하듯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하는 참 반가웠던 사람이었다. 세상이 쥐 죽은 듯 고요한 새벽에 그와 나는 간단한 악수와 인사를 한 뒤 그는 밤새 자신의 집 앞에 배달된 신문을 픽업하고 나는 동네 한 바퀴 걷기를 하였다. 어느새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길들여지기 시작을 하였다.
미국이라는 땅에 살면서 항상 어딜 가나 내 마음의 경계를 놓치 않은 습관이 몸에 밴 피부 색깔이 다른 이방인으로 살면서 백인이 절대 다수인 곳에서 하는 나의 새벽의 동네 한 바퀴에서 차가운 가을 새벽바람의 적막하고 스산한 날씨에 똑같은 시간 때에 어김없이 나타나 나를 반기는 그 노인은 나에게는 그가 얼마나 큰 위안이고 등대이고 따뜻한 이웃사촌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언제부터인가 새벽의 싸늘하고 스산한 길 선상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반겨주던 그가 그의 집 앞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이지 않았던 그런 쓸쓸한 날이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왠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기 시작을 했다. 자연히 그에게 길들여졌던 내 발걸음이 그의 집 앞에서 주저하고 멈추기 시작을 했었다.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에게 나의 몸이 길들어지고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노인이 있어야 할 집 앞에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던 모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집 앞에 며칠째 쌓여있는 신문들이었는데 나에게 무슨 신호라도 보내는 양 밤새 던져진 신문 뭉치가 밤새 내린 비와 흙탕물에 흠뻑 젖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제 웬일인가? 그에게 무슨 일이 났나? “ 지난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그가 신문을 줍지 않고 저렇게 방치한 적이 없었는데’라는 근심만 호기심 반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내 마음을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