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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병기

by Joung park

“나의 둘도 없는 친구 ‘라니’를 소개합니다”

(2번)


<라니와의 첫대면>

이럴 때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찰나적인 망설임과 주저함이 나를 엄습하였다. 그래도 ‘그냥 모른 척 그 집을 지나칠 수는 없다’라는 살아서 나의 충실한 ‘이웃사촌’이었던 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와 의리, 그리고 같은 동네에 사는 그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집 앞에서 마냥 서성거리고 있을 바로 그때에 나를 구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나와 함께 동네를 걷고 있었던 한 백발의 노인 ‘라니’이다. 바로 일요일 아침에 내 집을 방문한 친구 ‘라니’이다.


새벽녘에 마주친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서 백인 ‘라니’와 동양인 나는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반응이 너무나 달랐다. 내가 그 집 앞에서 두렵고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라니는 곧바로 뭔가 이상함을 직감했는지 즉시로 경찰에 신고를 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에서 라니가 보인 행동에서 뭔가 범상치 않는 아우라를 느꼈다. 뭔가 나 같은 일반인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침착함 그리고 숙달된 조교처럼 신속한 그의 대처 방법이 날 압도했었다.


특별히 현장에 곧바로 도착한 경찰들과 만날 때에 그의 진가는 발휘되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경찰 순찰차의 반짝이는 파란 불 그리고 근육질과 건장함으로 똘똘 뭉친 젊은 경찰들의 위풍당당한 포스에 전혀 기죽지도 위축되지도 않았었고 또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와중에도 또박 또박 조리 있게 911신고자로서 자신의 상황 판단의 배경과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보인 그의 포스와 목소리에는 뭔가 다른 차원의 위엄과 넘사벽의 권위감이 풍겨졌다.


출동한 경찰들이 라니와 함께 한참 동안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이런저런 방법으로 집 주인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결국에는 이상한 기우를 느낀 경찰이 그 집 대문을 강제적으로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영원’처럼 느껴진 한참이 지난 후에 경찰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집주인은 이미 사망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 동네 관리 사무실에서 온 소식란을 보면 부검의 결과로는 고인이 사망한지 벌써 2주 정도가 되었으며 플로리다 주에 사는 고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유일한 유가족인데 아직 연락이 되지 않아서 구체적인 고인의 추모식의 날짜는 추후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는 메시지이었다. 그리고 또 고인은 사망 후에 자신과 인연을 맺은 메릴랜드 의과 대학에 의학 교육과 연구를 위해 시신기증을 하였다는 소식도 첨부되었다. 어쩐지 갑자기 나를 엄습하는 인생의 허무함, 씁쓸함, 우울함과 서글픔이 성난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방 안에서 마지막을 보낸 고인에게는 죽음의 지경까지 찾는 이가 아무도 없었을까? 왜 내가 좀 더 일찍이 쌓여있는 신문을 보지 않았을까라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너무 앞만 보고 걸었던 내 아침 산보가 문제였던 것이다. 왜 나는 옆을 좀 살피면서 걷지 않았을까? 이제부터라도 옆과 뒤도 살피면서 동네 한 바퀴를 걸어야겠다는 때늦은 결심을 해보았다.


흔히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다.'라고들 하는 지금의 이 세상에서 라니와 나는 한 사람의 죽음을 직면한 특별한 인연을 맫은 것이고 그날 이후 우리는 동네 한 바퀴의 길가 선상에서 또 짐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없어서는 안 될 만큼이나 서로에게 참으로 귀하 인생의 길잡이, 응원가 또 동반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한 익숙해졌었던 이웃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라니와 나는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고인의 추모식장에서 라니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시시콜콜 장황스럽게 전형적인 미국 백인들처럼 전혀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었고 별 관심도 없었던 자신의 경력과 이력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을 하였다.


자신은 옛날에 미군 전투기 조종사로 한국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제대를 하고 아메리칸 항공사에서 파일럿으로 26년을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했다고 한다. 군인 그리고 민간 비행기 파일럿으로 한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한국이 자기에게는 ‘제2의 고향’ 같다면서 운을 떼었다. 한국의 서울, 오산 그리고 대구에서 먹었던 K-Food를 얘기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글과 나 사이에 놓인 언어와 피부 색깔의 벽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을 했다.


텍사스에 살다가 친한 친구가 펜타곤 (미 국방부)에 일하기 시작을 하자 친구 따라 강남을 간다고 친구 옆 동네인 워싱턴 부근으로 이사를 했는데 참으로 우연찮게 아내가 지금의 이 실버타운으로 이사를 했었는데 4년 전 자신이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이곳이 낯설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침실에서 바깥을 내려보다가 우연하게 새벽에 걷고 있는 한 동양인을 보기 시작을 하였는데 결국에는 그 동양인이 자신의 삶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1년 정도 동양인을 지켜보다가 마침내 용기백배해서 나선 동양인을 따라 함께 걷기로 작정을 했는데 결국에는 동네 한 바퀴에 동참을 하게 되었고 그 길가 선상에서 결국에는 이 동네가 자랑하는 최신식 운동기구가 즐비한 짐 (gym , fitness center)으로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라니와 나는 동네 한 바퀴를 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데 이제는 새벽길에서 둘도 없는 단짝이 (souls mate)으로 혹시라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누구 하나가 새벽길에서 빠지면 서로에게 대체 불가능한 그런 빈자리를 남긴다. 그러다가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바늘과 실처럼 함게 움직였던 단짝이 갑자기 길에서 또 짐에서 사라지니 라니가 느꼈던 외로움과 허전함이 커지기만 했었던 것이다.


적어도 곁으로 얼른 보기에는 우리들 사이에는 동반자가 될 만한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차라리 내가 보기에는 우리들은 마치 물과 기름 같다. 라니는 타고난 성격인지 낯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교성과 탁월한 친화력의 소유자이다. 반면에 나는 무뚝뚝하고 특별히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색하기 짝이 없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나에게 하루에 필요한 단어는 달랑 세 마디이다. "밥 뭇나?", "아는?", "자자."이 정도인데 이 세 마디만 가지고서도 지금까지 내 아내와 3자들에게서 쫓겨나거나 내 팽개치지 않은 것을 보 거가 또 내 식구들 굶게 않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나쁘지마는 아닌 것 같다.


참다못한 라니가 친구 찾기에 두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든 것이다. 라니가 물어물어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 방문한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주소나 전화번호 같은 신상 정보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또 그것이 통상적인 미국 사회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니까 라니가 이 큰 동네에서 내 집을 찾는 것은 말 그대로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 (Needle in a hay stack) ” 이란 뜻으로 우리의 “한양에서 김서방 찾기”와 같은 의미이다. 새벽 동네 한 바퀴의 동양인이라는 단서 하나만 달랑 들고 나선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내가 거주하는 콘도 집 주소를 찾은 것이다. 나에게 일어난 그동안의 통사정을 알게 된 라니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진 나를 보고서는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은 모양인지 잡았던 내 손을 놓기가 아쉬웠는지 못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헤어졌는데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았는지 며칠 후 라니가 꼭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다시 방문을 했었는데 ‘나에게 진 빚을 갚고 싶다’라는 알쏭달쏭 한 말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다 때문에 걷는 것을 시작하였기에 이제는 자신이 수술 후 허우적거리는 내가 그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어떤 모양으로도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동네의 여러 친구들과 함께 나를 구할 작전 (Saving Steven Park)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군대 시절부터 가졌던 삶의 신조가 있는데 바로 “As long as I am alive No body left behind 즉 내가 살아있는 한 내 전우는 그 누구도 낙오자가 없을 것이다”이라고 영화 속에서 나 들었던 말을 하였다. 그리고 자리를 떠면서 내 손에 USB 디스크가 든 마닐라 봉투를 전하며 시간이 있을 때에 꼭 꺼내어 디스크에 있는 영상을 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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