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의 산책

한밤의 산책이 부리는 기이하고도 다정한 마법

by 레비나스



깊은 잠의 수면 아래로 침잠하기 전, 문득 창밖의 적막이 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가끔, 아내와 함께 한밤의 산책을 나선다.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다.

잠옷 위에 두툼한 가디건 하나를 걸치고 오래된 슬리퍼에 맨발을 툭 밀어 넣어 현관을 나선다.

도어록이 잠기는 금속음이 복도의 고요를 날카롭게 가르고 나면 아파트 단지의 고요한 공기가 발목을 타고 천천히 차오른다.

그 고요함이 살갗에 닿는 감각은 이 시간이 일상과는 다른 궤도에 놓여 있음을 조용히 일러준다.


한밤의 산책은 단순히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낮 동안의 소음과 분주함 속에 짓눌려 있던 세상의 냄새를 온몸으로 복원하는 과정에 가깝다.

계절은 언제나 눈보다 코끝에 먼저 도착한다.

봄밤의 공기 속에는 봄꽃들이 밀어 올리는 달콤한 향이 가득하다.

그 향을 깊게 들이마시면 유년 시절 어느 골목 끝에서 놓쳤던 기억들이 가슴 언저리로 스며든다.

여름이면 비에 젖은 풀줄기에서 뻗어 나오는 치열한 생명력이 가슴에 스미고, 가을의 공기에는 마른 나무의 송진 향이 섞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그중에서도 겨울밤의 공기는 가장 투명하다.

얼어붙은 땅과 바스라진 낙엽에서 퍼지는 향기가 차갑게 어둠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그러한 계절의 냄새를 맡고서야 나는 비로소 하루를 마친 내 삶의 무게를 실감한다.

비워내야 할 것들과 기어이 품어야 할 것들을 구별하는 법을, 고요한 밤공기는 묵묵히 가르쳐준다.


나란히 걷는 아내의 손등을 가만히 건드려 본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작은 온기는 밤의 어스름 속에 부유하던 나를 다시 단단한 현실의 지면으로 붙들어 맨다.

방긋방긋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하루의 조각들을 도란도란 들려주는 아내를 보고 있으면, 밤공기가 부리는 마법에 걸린 듯 기이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달빛 아래서 주름진 시간의 결들이 지워지고 서툰 사랑 앞에 수줍어하던 이십 대의 그 어린 아가씨가 여전히 내 곁을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세월이 흘러 생의 무늬는 달라졌을지언정 아내의 미소는 빛바래지 않았다.

그 미소는 여전히 처음처럼 내 마음의 중심을 흔들어 놓는다.

사랑스럽다는 말로는 다 메워지지 않는, 어떤 경건한 애틋함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겁게 차오른다.


나는 아내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어본다.

손바닥을 타고 번지는 온기는 몸속 깊은 곳까지 퍼져나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의 모서리를 말랑하게 녹여낸다.

그 온기는 세상의 어떤 문장보다 다정한 위로이며, 우리가 함께 건너온 고단한 시간들에 대한 무언의 응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는 내게 낡아가는 동반자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읽고 기록해야 할 소중한 첫 문장이 된다.


고요한 단지 사이로 어느 집의 텔레비전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낮게 깔리고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을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밤공기 속에서 희미하게 흩어진다.

그 소리들은 소음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냄새가 섞인, 어떤 안도감에 가깝다.

고개를 들어 불 켜진 창가들을 올려다본다.

저 창문 너머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켜 둔 불빛들은 누군가에게는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이정표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빛들을 길잡이 삼아 다시 우리의 작은 안식처로 돌아간다.

밤은 깊어질수록 공기의 냄새를 진하게 품고 아내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여전히 달콤하다.

세상이 모두 잠든 이 고요한 시간, 우리가 서로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며 걷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팽팽하게 차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