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농사와 노후의 기대
사람들은 흔히 노후의 평안을 '자식 농사'의 결실이라 말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어 자식들을 제 자리에 앉혀두면, 부모는 비로소 지팡이를 내려놓고 그늘에서 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하지만 때로 그 농사는 풍년이 아니라, 부모의 남은 밑천까지 소리 없이 갉아먹는 마른장마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퇴직하신 친한 형님 한분이 계신다. 현직에 계실 때부터 재테크를 꼼꼼히 해두신 덕에 노후 걱정은 남의 일이라던 분이었다. 두 자녀는 번듯한 직장에 자리를 잡았고, 퇴직에 맞춰 차례로 가정을 꾸렸다. 형님은 대도시의 브랜드 아파트를 한 채씩까지 내어주었으니 부모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고 안도하셨다. 이제 남은 생은 아내와 손을 잡고 여행이나 다니며, 그동안 미뤄둔 취미생활에 젖어 살겠노라 호기롭게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오랜만에 형님네 내외와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한적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마주 앉은 형님의 얼굴은 바닷물에 오래 불어버린 고목처럼 생기가 없었다. 소주잔을 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야야, 말도 마라. 내는 인자 자슥이 아이고 원수가 기어들어오는 거 같다."
형님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뱉어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귓가를 찔렀다.
"지들이 가장이 되드마는 사람이 우째 이리 변하노? 올 때마다 아부지 힘들다, 돈 없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아이가. 며느리 그 아는 옆에서 눈물 찔찔 짜고 앉아 있고. 내는 그 꼬라지 보고 있으면 밥알이 모래알 씹는 거 같다."
형님은 헛웃음을 지으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
기이한 것은 그들의 '가난'이었다. 돈이 없어 죽겠노라 한숨을 내쉬는 자식들의 차는 어느새 번듯한 외제차로 바뀌어 있었고, 올 때마다 달라지는 며느리의 명품 가방은 형님의 노후 자금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말없는 영수증이었다.
"주식해가 돈 다 날릿다 카는데 우짜겠노. 내가 안 채워주면 아덜이 길바닥에 나앉게 생깄는데. 더 염불나기는 한놈한테 뭐 해주면 또 한놈이 자기는 왜 안주냐고 방방 뛰고, 그러다 지들끼리 싸우고. 내 평생에 여행은 무신... 내 인자 다시 막일이라도 뛰어야 될 판이다. 그래가 돈 없다 캤다마는, 요새는 어데 땅 있는 것까지 어째 알았는지 아부지 그거 팔면 안 됩니까 카는데... 참말로 억장이 무너지드라."
형님은 핏발 선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니네 부부가 천하에 제일 부럽다. 자슥 없는 게 그기 복인 줄 알고 살그라. 진짜다."
형님이 따라준 소주잔을 받아 들고,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조용히 가늠했다. 자식이 부모의 노후를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 부모가 평생 세워둔 마지막 방파제를 허물어뜨리는 거센 파도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형님이 내어준 아파트와 땅은 자식들에게 '부모의 사랑'이 아니라 '당연히 가져갈 권리'로 읽혔던 모양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내의 손을 평소보다 조금 더 꽉 쥐었다.
자식이 없다는 것. 그것은 때로 삶의 풍경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한다. 명절 식탁이 둘 뿐이라는 것, 늙어가는 몸 곁에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그 쓸쓸함을 모른 척하며 살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기생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냉정하고도 조용한 안도이기도 하다. 자식이 없어 느끼는 결핍보다, 자식이 있어 느끼는 배신감이 더 깊게 파이는 나이. 쉰의 문턱에서 나는 처음으로 '없음'이 주는, 비정하고도 아름다운 평온을 생각했다.
그 평온은 행복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행복이 무언가로 채워지는 감각이라면, 이것은 무언가에 허물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소란스럽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그저 서로 곁에 있는 것. 그것이 우리 부부가 선택한 삶의 조건이었고 나는 그 조건 안에서 오히려 단단해진 무언가를 느낀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의 공기는 여전히 투명하고 고요했다. 우리는 정리를 하고 맥주잔으로 건배를 하며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형님의 떨리는 손가락과 핏발 선 눈이 잠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글프고도 감사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