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 사람이 직접 가서 서는 것
통영의 겨울 아침은 차가운 정적 속에 스며든 바다 냄새로 시작된다. 창틀에 겨울 햇살의 손길이 채 닿기도 전,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부산스러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성스레 화장을 고치고, 아끼고 아껴두었던 가장 고급스러운 코트를 침대 위에 정갈하게 펴놓은 채 옷매무새를 살피는 아내. 그 진지한 뒷모습을 보며 나는 며칠 전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주말엔 광주에 가자던 아내의 짧은 선포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을 담고 있었다. 설에 다녀온 지 보름도 안 됐다는 나의 군색한 변명은 아내의 혀 차는 소리에 힘없이 꺾였다.
"아들이란 사람이 어머니 가슴에 생채기 난 건 보지도 못하고..."
나를 쏘아붙이던 아내의 서슬 퍼런 질책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놓친 것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어머니의 멍든 자존심이었음을 깨달았다.
사건은 어머니가 다니시는 노인정에서 시작되었다. 회장이라는 작자가 소액의 운영비를 횡령했다가 어머니께 들키자, 되레 어머니를 사기꾼으로 몰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는 이야기였다. 평생을 시퍼런 서슬처럼 정직하게 살아온 당신의 이름 석 자가 더럽혀졌는데도, 어머니는 일이 커질까 두려워 누구에게도 말 못 한 채 그 울화통을 혼자 삭이고 계셨다.
명절날,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뱉으신 하소연을 나는 스마트폰 뒤에 숨어 '흔한 노인네들의 소란'쯤으로 치부했으나, 아내는 그 떨리는 음성 사이의 행간에서 어머니의 눈물을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그때 이미 결심한 듯 보였다.
회장이라는 작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도 처절한 복수를 해주기로.
광주로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내는 치밀하게 행동했다. 노인정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유자차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통영의 유기농 농장을 수소문해 유자청을 구했고, 예쁜 수제 과자와 제일 좋은 과일 한 박스를 준비했다.
차 뒷좌석에 묵직한 유자청 병들과 화사한 간식거리가 실렸다. 통영을 지나 섬진강을 건너는 길, 창밖 들판은 아직 겨울의 무채색을 벗지 못했으나 핸들을 잡은 내 곁의 아내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빛을 내고 있었다. 무심함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현실을 외면했던 아들과 달리, 며느리는 어머니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릴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노인정 문을 열었을 때, 실내엔 식사를 마친 어르신들의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그 낡고 낮은 천장 아래로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은 아내가 환한 미소를 띠며 들어서자, 순식간에 모든 소음이 멎었다.
"저희 어머님이 여기 계신 것 같아서요..."
찰나의 정적 속에서 들려온 아내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정중하고 품격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의 눈이 커졌다. 아내는 달려가 어머니의 거친 손등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큼직하고 맑은 목소리가 노인정 안의 공기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화사하게 꾸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찾아 직접 노인정까지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머니는 단숨에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이 되었다.
아내는 능숙하게 유자차를 우려내고 과일을 깎아 어르신들 앞에 놓으며 싹싹하게 굴었다.
"어머니가 노인정 자랑을 하도 하셔서 감사한 마음에 통영에서 챙겨 왔어요."
웃는 아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찬란한 연극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는 회장에게 다가가 가장 예쁜 미소를 지으며 유자차 한 잔을 건넸다.
"노인정 회장님이셔요?"
그것은 독배보다 치명적이고 설탕보다 달콤한 품격의 응징이었다. 자식 귀한 줄 알고 대접받는 어머니의 위상은 노인정 천장을 뚫고 솟구쳤다. 회장 노인은 아내의 얼굴과 어물쩡하게 선 내 얼굴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아내와 눈이 마주칠까 봐 연신 찻잔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치졸한 권위가 아내의 기품 앞에 완전히 조각난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조수석의 어머니는 오래도록 창밖만 보셨다. 뭐 하러 이런 비싼 걸 해왔느냐는 타박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주름진 손등을 어루만지다 다시 창밖을 보셨다. 보름 전 명절날, 잔뜩 굽어 있던 어머니의 어깨가 비로소 활짝 펴져 있었다.
세상은 타인의 상처를 흔한 일로 가볍게 여기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상처는 삶의 근간이 흔들리는 일이다. 아내는 그 비극의 현장을 가장 품격 있는 희극으로 바꿔놓았다. 나의 방심이 말라버린 흙이었다면, 아내의 복수는 그 흙을 덮는 화사한 꽃잎이었다. 통영의 유자 향기가 노인정에 머물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한 가지를 확인했다.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은 거친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빛나는 태도라는 것을 말이다.
고향 집 현관문을 열며 어머니는 아버지께 큰소리로 외치셨다.
"막내 왔어라! 얼른 나오시오!"
광주의 겨울 하늘이 그날따라 눈이 부시게 푸르고 투명했다. 말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 사람이 직접 가서 서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걸 나는 그날에야 겨우 알았다. 어머니는 이제 노인정 문을 열 때마다 당신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그날의 향기를 떠올리실 것이다. 그 기억 하나가 어머니의 등을 평생 꼿꼿하게 펴드릴 것이다. 부끄러움과 감사함이 뒤엉킨 채로, 나는 오래도록 어머니의 당당해진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