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꿉달이 되었는가

집게를 내려놓지 못한 죄, 어느 ‘꿉달’의 형이상학적 고찰

by 레비나스



나는 ‘꿉달’로 통한다.

고기 굽기의 달인.

이 명예로운(?) 호칭은 지난 20년 넘는 동안 직장회식의 자욱한 고기 연기 속에서 집게와 가위를 휘두르며 일궈낸, 내 훈장 같은 것이다.

일화로, 어느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고 계산할때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고깃집만 30년 했는데 손님처럼 고기 잘 굽는 분은 처음입니다."


예전의 회식 자리는 일종의 성인식이었다.

테이블의 막내가 집게를 집어 드는 순간, 선배들의 날카로운 시선이라는 포화가 쏟아졌다.

"야, 뒤집어!", "타잖아!", "가위질이 그게 뭐냐?" 같은 타박을 견디며 겉바속촉의 미학을 구현해내는 것.

그것은 단순한 취사 행위가 아니라 조직 내에서의 생존술이자, 타인에 대한 고도의 배려였다.

나는 그 행위가 좋았다.

벌겋게 취기가 오른 유쾌한 얼굴로 술잔을 기울이며 내가 구운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그네들의 삭막하고 지친 일상을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질 낮은 고기도 내 손끝을 거치면 육즙 가득한 특급으로 부활하는 그 마법 같은 공정.

나는 그렇게 '고기 굽는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


어느덧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해 나도 ‘고참’이 되었다.

이제는 후배들이 예의상 집게를 먼저 들 법도 한 연차다.

실제로 그들이 집게를 들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들의 어설픈 손놀림을 견디지 못했다.

"아니예요. 제가 굽는 게 편해요. 그냥 맛있게 먹어요."

인자한 미소를 띠며 집게를 뺏어 드는 내 모습은 겉으로는 배려 넘치는 선배의 전형이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요즘의 회식 풍경은 내가 알던 과거의 문법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노란 조명 아래, 불판이 달궈지기 시작하면 테이블엔 묘한 정적이 흐른다.

젊은 직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젓가락을 정렬하고, 마치 공연을 기다리는 관객처럼 내 손끝을 주시한다.

내가 선홍빛 고기를 불판 위에 올리는 순간, 그들의 눈망울은 맑고 투명하게 빛난다.

거기엔 추호의 가식도, 미안함도 없다.

그저 ‘숙련된 전문가가 제공하는 최상의 퍼포먼스를 즐기겠다’는 순수한 소비자적 마인드뿐이다.


나는 고기를 자르고, 뒤집고, 적절한 타이밍에 가장자리로 옮기는 일련의 고난도 노동을 수행한다.

치익-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이 퍼지면 후배들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내가 하사할 고기 한 점만을 기다린다.

"와, 진짜 맛있어요!"라는 찬사가 터져 나온다.

나는 그 칭찬에 취해 더욱 정성스럽게 가위질을 한다.

질긴 비계는 쳐내고, 딱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그들의 앞접시에 놓아준다.

그런데 그 찬사가 끝나고 나면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고기는 구워지는 족족 그들의 입속으로 사라지는데 정작 내 앞접시는 텅 비어 있다.

20년 차 선배가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으면 빈말이라도 “이제 좀 드세요”라거나 상추쌈 하나쯤은 건넬 법도 한데,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미각에만 집중한다.

그들에게 이 회식 자리는 소통의 장이 아니라, '직접 구워주는 고기 맛집'에 불과한 것일까.

속에서는 울화통이 터진다.

‘이것들아, 나도 입이 있고 배가 고프단다!’라는 외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나는 다시금 인내의 가면을 고쳐 쓴다.

여기서 한마디 하는 순간, 나는 그날로 ‘구태의연한 보상심리에 찌든 꼰대’로 박제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에게 배려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며, 내가 선택한 ‘굽기’라는 배려에 대해 그들이 ‘먹기’로 화답하는 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합리적인 교환이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세대의 갈등이라기보다 ‘배려의 과잉’과 ‘권리의 명확함’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나는 배려를 권위로 착각했고 그들은 나의 배려를 하나의 서비스로 수용했다.

내가 내려놓지 못한 집게는 어쩌면 ‘내가 여전히 이 조직에서 쓸모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은 노병의 마지막 집착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식이 끝나갈 무렵, 불판 위에는 식어서 굳는 고기 몇 조각만이 남는다.

배는 고픈데 속은 더부룩한 묘한 허기가 밀려온다.

나는 결국 된장찌개와 공기밥에 굳어버린 고기 몇조각을 얹어 먹는다.

'다음 회식 때는 반드시 집게를 넘겨주리라.'

하지만 나는 벌써 알고 있다.

다음 회식 자리에서 불판 위에 올려진 선홍빛 고기를 보는 순간, 나는 다시 본능적으로 집게를 쥘 것이다.

저 아까운 고기를 태워 먹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속 좁은 ‘꿉달’로 남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롭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했고 고기는 여전히 맛있다. 다만, 누군가 내 입에도 고기 한 점 넣어주길 바라는 소박한 소망은 아마도 내가 집게를 완전히 내려놓는 그날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위대한 꿉달로서, 고독한 집게의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