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기록자 1부
정하는 사표를 쓰고 나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일단 잠을 좀 늘어지게 잘 요량이었다. 기자가 된 순간부터 눈만 뜨면 ‘오늘 발제 뭐 하지’를 생각하며 살아왔다. 발제는 기자의 취재 능력을 매일 데스크에게 확인받는 일이다. 오늘 내가 쓸 기사의 내용을 보고하고, 데스크 회의에서는 각 기자들의 발제를 밸류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지면 기사 배치를 정한다. 발제거리가 있으면 그날 하루는 놀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발제거리가 없으면 하루 종일 전전긍긍해야 했다. 패배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루도 봐주는 일은 없었다. 한 번은 지면 톱기사를 비워둘 테니 어떻게든 기사를 가져오라는 부장의 지시를 듣고 한동안 멍하게 하늘을 본 적도 있다. 그날 정하는 휴대전화에 저장돼 있는 모든 취재원에게 전화를 돌려 발제거리를 찾아야 했다.
매일 새로운 기사를 발굴하고,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취재원과 어떻게든 저녁 약속을 잡고,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는 건 발제를 못해 패배자가 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한 일종의 ‘보험’을 들어 놓는 일이었다. 발제가 통과돼 지면 계획에 잡히고, 마감 시간 내에 기사를 쓰면, 퇴근하고, 씻고, 누워서,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오늘 발제 뭐 하지’를 생각해야 했다. 휴가 때도 아침 6시에 꼬박 눈을 뜨고 습관적으로 ‘발제 뭐 하지’를 생각했다. 휴가가 끝나고 복귀해야 할 때면 ‘발제 뭐 하지’를 고민하다 우울해지곤 했다. 선배들은 기자라면 숙명이라고, 어떤 기자든 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8년 동안 발제의 굴레에 사는 건 힘든 일이었다.
이제 그 망할 발제는 안 해도 된다. 정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고, 백수가 된 첫날 침대 이불속에서 꼼짝 않을 요량이었다. 그렇지만 시원하게 실패했다. 8년간 익숙해진 리듬에 새벽 6시 눈이 번쩍 떠졌고, 억울해져 다시 잠을 청했고 얼마간 쪽잠에 들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끊어지지 않는 진동에 결국 전화를 받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알아? 당장 회사로 안 튀어와?!”
정하는 통화가 끊어진 휴대전화를 들고 영문을 몰라 어벙벙했다. 휴대폰 시계는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제 노트북 반납도 했고, 사직서도 냈는데, 무슨 절차가 더 남은 것인가, 아니 일단은 왜 편집국 행정실이 아닌 미친개가 전화를 한 것인가. 부랴부랴 세수만 하고 익숙한 백팩을 들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 로비에서 뒷짐 지고 서 있는 전국부장을 마주쳤다. 수습일 때 사회부장으로 모셨지만 정하가 직속 후배였던 적은 없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한 번씩 볼 때마다 늘 고생이 많다고, 기사 잘 보고 있다고 한 마디씩 해주시던 따뜻한 분이었다. 정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전국부장이 불러 세우며 그쪽이 아니라고 했다.
전국부장이 정하를 데리고 향한 곳은 대한일보 지하 3층이었다. 주차장 옆에 마련된 간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하는 조직에 몸담으면서 회사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책상 세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간 한가운데에는 어제 봤던 미친개가 앉아있다. 미친개는 정하를 보지도 않고 오늘자로 특별취재팀으로 인사발령이 날 거라고 했다.
“저 사표 썼는데요?”
“사표는 수리될 때까지 일하는 게 원칙이야. 넌 기자라는 놈이 기본 노동법도 몰라?”
짜증은 나지만 반박할 말은 찾지 못했다. 탁진은 정하의 앞에 A4 용지 한 장을 쓰윽 내밀었다. 정하가 썼다가 삭제된 김복동 의원 기사였다.
“8년 차라는 놈이 뭐가 잘못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정하는 큰 눈망울을 더 크게 뜨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취재윤리도 지켰고, 발로 뛰어서 증거까지 다 확보했습니다.”
“김복동 의원이, 저 윗사람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게 문제야.”
“그게 왜요?”
정하는 저 인간이 하는 말 중에서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대통령과 고등학교 동창인 국회의원은 아들의 마약수사를 하는 서장과 저녁식사를 해도 된다는 것인가. 전설의 미친개라더니, 그냥 미친놈 아닌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기자라는 것인가.
“선배도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의 기사를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네가 너무 핵심 인물의 기사를 가볍게 가져왔다는 게 문제지.”
정하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정하를 보고 탁진은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하만 보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제 국장이 하는 말 못 들었어? 이 회사는,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 그 중심에 있는 게 지금 편집국장이고. 그런데 대통령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진짜 킹메이커인 현역 국회의원 기사를 내보낼 것 같아? 정치부에 있으면서 그 정도 정무적인 감각은 못 배웠나 보지?”
“기자가 정무적인 감각을 생각하면서 기사를 씁니까?”
“아니지. 대신 기사를 무겁게 가져갈 수 있어야지.”
“됐습니다, 어차피 사표 냈고, 전 이제 기자도 아니고요.”
“김 의원 쿼트 따오면, 이 기사 내가 보도하게 해 줄게.”
“반론권은 충분히 보장했습니다. 당사자가 거부했고요. 거부한 건 그의 자유예요.”
“무조건 따와. 설마, 그것도 못 하는 건 아니지?”
정하의 자존심 버튼이 눌렸다.
“저 수습 아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