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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an 11. 2024

주식을 하면  집안이 망하는 줄 알았다

어린 도박꾼이 커서 주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

학창 시절 나는 온갖 종류의 도박을 사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고사리손으로 학종이를 넘기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교과서 표지를 불룩하게 만든 후 동전을 올려놓고 손바닥이 빨갛게 되도록 내려쳤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 게임을 판치기라고 불렀는데, 엄마가 하굣길에 과자를 사 먹으라고 준 500원은 곧잘 도박 자금으로 쓰이곤 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멀대같이 키가 큰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섯다의 족보를 줄줄 외우고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이 반 저 반 옮겨 다니며 승부를 봤다.

판치기에서는 돈을 자주 잃었지만 섯다는 조금 달랐다.

강한 패가 나오기 전까지 큰 배팅을 하지 않고 몸을 사리는 내 보수적 전략이 혈기 왕성한 그 나이 때 남자아이들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나를 보고 부모님은 걱정이 먼저 앞섰으리라.

집에서 화투가 발견되면 호되게 나무라고 명절에 친척들과 모여서 하는 간단한 고스톱이나 심지어 윷놀이에도 나를 끼워주지 않았다.

도박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유희왕 카드 (반쯤 걸치게 책상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으로 튕겨 뒤집으면 따는 구조였다) 및 포켓몬 딱지는 모두 발견 족족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스릴을 사랑하는 아들이 엇나가지 않게 노력하셨고 그 노력은 내가 대학에 무사히 진학함으로써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대학생이 된 뒤에는 다른 어떤 것 보다도 연애에 힘을 많이 썼다.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듣는 따분한 '세계 경제와 기업' 수업에서도 교수님의 말씀보다는 옆 자리 후배와의 대화에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한 학기의 수업은 주식의 기본 개념을 잡아주는 기회가 되었다.

매경에서 오랜 시간을 일하신 교수님은 우리에게 양봉, 음봉의 차트 보는 법부터 시작해서 당시 연준 의장인 재닛 옐런의 비둘기파적 스탠스나 EV/EBITDA 등 기업 가치평가 기준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 주셨다.

주식은 도박인데, 승률이 계산이 가능한 블랙잭이나 홀덤과 비슷하다는 관념이 이때쯤 생겼다.


졸업 전 취직의 바늘구멍을 통과하려고 애쓰던 와중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 아버지가 너네 주식 계좌 만들면 밥 한번 사주신대

NH투자증권 지점장이신 친구의 아버지가 가난한 학생들 용돈 주시려고 명분을 만드신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내게는 단순한 밥 한 끼가 아닌 인생을 뒤바꿔 놓는 한 문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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