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이자 최악이던 하루
정말 기분 더러운 일이 있었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화나는 일.
하지만 우리 같은 일을 또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여기에 자세히 남기려고 한다.
우리는 돈을 뜯겼다.
그것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었던 빅벤에서.
이 일에 대해선 끝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고, 우리는 오늘 가장 먼저 포토벨로 마켓에 갔다.
포토벨로 마켓
포토벨로 마켓은 토요일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부러 포토벨로 마켓 일정을 토요일에 잡았는데, 이런. 사람이 정말 많았다. 거의 윈터 원더랜드 급으로.
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지 모르겠다.
우리는 일단 사람들도 피하고 고픈 배도 채울 겸 아무 데나 보이는 피시 앤 칩스 식당에 들어갔다.
(어제 파스타부터 오늘 피시 앤 칩스까지 정말 무계획하고 즉흥적인 식사 선택이었다.)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맛있었다.
지난번에 런던에 왔을 때는 피시 앤 칩스가 맛이 없다고 해서 안 먹었었는데 생선까스를 좋아하는 내 입맛엔 잘 맞았다.
우리는 라지 사이즈를 하나 시켜 둘이 나누어 먹었는데 양이 딱 적당했다.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나서 여기서 처음으로 더치페이를 시도했다.
더치페이가 영어로 뭔지 몰라서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spilt the bill' 이더라.
우리는 이후에도 왠만하면 계속 'spilt the bill'을 외쳤다. 나중에 돈을 나누려면 복잡하기도 하니까.
더 노팅힐 북샵
식사를 끝내고 노팅힐 서점으로 갔다.
모두가 아는 그 영화 ‘노팅힐’의 바로 그 서점 되시겠다.
사실 나는 가짜 노팅힐 서점에 갈 뻔했는데 친구가 거기 아니라고 알려줘서 다행히 제대로 된 노팅힐 서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노팅힐 서점 앞에는 줄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사진 찍는 줄, 그리고 하나는 입장하는 줄이었다.
우리는 굳이 사진을 찍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바로 입장 줄에 섰다. 입장 줄이 빠르게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서점 안에 있는 사람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곧 서점에 들어갈 수 있었고 나는 친구에게 줄 영시집을 하나 사고 친구는 어머니 선물로 에코백과 자신을 위한 작은 아씨들 원서를 샀다.
사실 친구는 오만과 편견을 사려고 고민 중이었는데 내가 작은 아씨들 진짜 재밌다고 꼬셔서 작은 아씨들을 산 거였다.
근데 내 꼬심에 내가 넘어갔는지 나도 친구가 산 책을 보니 양장 표지도 너무 예쁘고 해서 여행 마지막 날 다시 노팅힐 서점에 들러 나도 작은 아씨들을 샀다.
그 정도로 책이 너무 예뻤다.
그리고 우리는 둘 다 아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를 위해 셜록홈스 원서도 한 권 샀다.
그 친구가 셜록 홈스를 좋아했던 것 같은 기억에서였다.
노팅힐 서점은 내게 이번 런던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내가 기본적으로 서점이나 도서관을 좋아하기도 하고 노팅힐 서점은 분위기라던지 조명, 책의 배치 같은 게 너무 조화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나가는 만큼 들여보내서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많지는 않았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한산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지금까지 갔던 곳과 갈 곳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
이곳은 그렇게 편안하게 책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었다.
버로우 마켓
어제 닫았던 버로우 마켓에 재방문했다. 도저히 버로우 마켓에 맛있는 음식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로우 마켓에 가는 길에 내 데이터가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LTE 라는 신호는 뜨는데 아무런 인터넷이 되지 않더니 결국 신호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객센터에 전화해 겨우 복구했다. 단말기에 문제가 있었다나.
안 그래도 트래블로그 카드에 파운드가 없는데 LTE가 안 되면 환전을 못하니까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숙소에도 못 갈 상황이었다.
LTE를 겨우 복구하고 나서 편안한 마음으로 버로우 마켓으로 향했다.
버로우 마켓으로 가는 길에 핫 핑크 캐리어를 끌고 가시는 여성분을 보고 영국 드라마 ‘셜록’의 시즌 1, EP 1 의 ‘Pink!'가 떠올랐다.
그렇게 셜록 덕후인 걸 인증하면서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또 걷고 또 걸어서 버로우 마켓에 도착했다.
결국 어제 못 먹은 버섯 리소토와 빠에야를 먹었는데 난 버섯 리소토가 짭짤하니 더 맛있었고 친구 입맛에는 버섯 리소토는 조금 짰고 간으로 보면 빠에야가 더 맛있었다고 했다.
참고로 줄은 빠에야가 훠얼씬 길었다.
너무 길어서 중간에 사람들 지나가는 길을 비우고 줄을 서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줄이 생각보다 빨리 줄어서 금방 먹을 수 있었다. 줄이 빨리 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종업원들의 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버섯 리소토와 빠에야를 하나씩 사서 마켓 한쪽 구석에 서서 먹었는데 그래도 충분히 맛있었다.
추워서 덜덜 떨면서 먹기는 했지만.
초코딸기는 어제 먹은 핫초코가 너무 강렬해서 패스하고 나는 깔끔한 게 먹고 싶어 라벤더(?) 레몬 에이드를 마셨는데 마시다가 얼어 죽을 것 같아서 반만 마시고 버렸다.
친구는 와플을 사 먹었는데 분명 초코가 아닌 소스를 시켰음에도 누가 봐도 누텔라 소스가 얹어진 와플이 나와 친구는 초코 피하려다 초코를 먹게 되었다.
포토벨로 마켓이나 버로우 마켓이나 사람이 정말, 정말, 너무 많아서 사람 구경 원 없이 했다.
정말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언어,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이곳 런던에 모여 있었다.
친구가 숙소에 와서 하는 말이 ‘이제 사람이 좀 적은 곳에 가고 싶어.’였다.
인형탈
그리고 오늘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 빅벤과 런던아이.
이곳에서 우리는 돈을 뜯겼다.
런던아이에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빅벤에 도착하고 나서 일이 터졌다.
우리는 빅벤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인형탈을 쓴 사람 두 명이 내 친구의 어깨에 팔을 올리더니 함께 사진을 찍는 거였다.
나는 그 사진을 찍어주었고 나에게도 오라고 하길래 친구와 자리를 바꾸면서 순간,
‘설마, 돈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그 인형탈을 쓴 사람들은 우리 각자에게 10파운드씩, 그러니까 둘 다 합하면 총 40파운드를 뜯어갔다.
망할, 날강도 같으니.
하지만 돈을 주지 않으면 절대 우릴 보내주지 않을 것 같았고 그들의 떡대는 도저히 우리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명은 심지어 카드 리더기까지 들이대면서 돈을 요구했다.
우리는 기분이 완전히 상해서 빅벤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서 빅벤에서 찍은 사진을 다 삭제했다.
보면 더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전자레인지
숙소에 도착해 보니 방에 우리가 그동안 요청한 전자레인지가 드디어 놓여 있었다.
아침에 덜덜 떨면서 숙소 주인에게 전화까지 해서 얻어낸 소중한 전자레인지였다.
꼭 마이크로웨이브무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전자레인지를 사용하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게 최악의 인형탈과 최고의 노팅힐이 모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