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이준한] 한국영화의 해방과 혼돈의 순간 #1

깡패가 주도한 1950년대 한국영화

by 이준한

<서두>


저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여러분은 한국영화가 어떻게 출범했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고 계시나요? 한반도는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습니다. 대체 이런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영화라는 매체는 한국에 뿌리를 내렸던 걸까요?


[한국영화의 해방과 혼돈의 순간]이라는 거창한 제목은, 그 거창함의 부피만큼이나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영화의 기록입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당대의 기록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저 역시 여러분과 함께 이 글을 읽어 내려가며 얼이 빠지는 경험을 하고자 합니다.


그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깡패 임화수는 어떻게 한국 연예계의 왕이 되었나-


임화수는 기분이 좋았다. 전쟁으로 전국이 초토화가 됐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평화극장'이 내 것이다. 내가 드디어 극장주가 되었다!


지난 날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갔다. 임화수는 해방 이후 전쟁 발발 이전까지 종로 4가에 있는 제일극장의 매점원으로 일했다. 소학교 중퇴 후 그는 형무소에서 이른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아는 것은 없고 싸움을 좋아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대한 애착이 컸다. 1945년 임화수는 광복 기념으로 출옥했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자신이 일했던 제일극장을 헐값에 매입했다. 1년 후 극장 이름을 평화극장으로 바꿔 재개관했다.


1951년의 임화수는 평화극장의 극장주인 동시에 깡패였다. 동대문의 이정재와 인연을 맺어 이인자 노릇을 하며 온갖 폭력을 행사했다. 그 배경에는 이승만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명확하게 확인은 할 수 없으나 임화수가 한국전쟁에 참여했을 당시 이승만이 위로 차 부대를 방문하자 아버지!!! 라며 오열하여 이승만의 호감을 샀다는 후문이 있다) 아무튼 임화수는 이승만의 경호 책임자 곽영주와의 친분으로 폭력과 예술, 물과 기름의 영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극장에 대한 애착이 단순한 돈욕심이었는지, 예술인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임화수는 자신의 영역을 더욱 확장하고, 고착화시키고 싶었다. 그는 1954년 정부와의 연줄을 이용해 '국산영화 입장권 면세조치'라는 정책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1938년부터 영화 관람료에 붙었던 세금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를 통해 국산영화의 수익 및 흥행을 높이고(즉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외화 수입쿼터를 세워 견제했다. 깡패가 정책을 요청하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인다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불법은 195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시장을 급성장시켰다.


임화수는 1954년부터 연예잡지 [연애시보], 월간지 [카오스], 대형 엔터테인먼트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으로 나섰다. 그야말로 1950년대 연예계의 대부이자 대통령이었다. 이후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협업하여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 합작영화 <이국정원>(1957)을 제작하는데 이르렀다.


한국의 작곡가와 홍콩의 여가수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들이 어릴 적 헤어진 남매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스토리. 한국멜로영화의 전형이지만, 한국 톱스타 김진규(훗날 김기영 감독의 <하녀>에 출연)와 홍콩 톱스타 우민이 출연해 한국과 홍콩 두 나라에서 모두 흥행을 거두었다. 임화수는 영화제작에 있어서는 어쩌면 괄목할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을 내세우기에는 과가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1950년대 그가 제작한 영화 대부분은 이승만의 자유당을 비호하는 관제영화였고 이는 곧 극우활동으로 번졌다. 1959년 3월 반공예술인당을 결성해 문화예술계 속 자신의 자위를 이용해 연예인들을 정치 선전공작대로 활용했다. 이승만을 위한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과>(1959)를 제작하기도 했다(영화에서 이승만은 흠결이 없는 완벽한 인물로 등장한다).


배우들을 향한 폭력과 성폭행, 그리고 3.15 부정선거 등에 깊숙이 개입했던 임화수의 시대는 1950년대의 끝과 함께 막을 내린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그의 개인적 욕망(영화입장세 면제, 한국연예주식회사 설립)은 1955년 이후 한국 영화 제작 편수를 폭발적으로 늘리는데 공헌했다. 하지만 극우 사상, 지위를 활용한 폭력은 자신의 모든 공을 덮어버리며 역사 속에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참고

https://www.kmdb.or.kr/db/per/00005381

https://ko.wikipedia.org/wiki/임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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