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정권, 공보 영화, 그리고 민간 영화
한 편의 영화가 시대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가깝게는 <도가니>를 뽑을 수 있겠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바탕으로 벌어진 해당 사건을 각색한 <도가니>는 큰 방향을 일었다. 영화 개봉 이후 해당 사건 주동자들에 대한 처벌 여론이 높아지자 2011년 9월 재수사가 시작되고 국회에서는 법 제정을 하는가 하면 광주 인화학교는 이듬해 폐교되었다.
조금 멀리, 1960년대에는 박상호 감독의 <비무장지대>(1965)를 뽑을 수 있다. 세계 최초로 비무장지대에서 촬영한 세미다큐멘터리 영화다(대체 그 지뢰밭에서 어떻게 영화를 촬영했는지 모르겠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어머니를 찾아가던 소녀기 헌병 복장에 복한군 복장을 주렁주렁 매단 소년을 만나 친분을 쌓아간다. 소년이 소녀를 챙기다 북한 간첩에 총을 맞아 죽고 소녀는 다시 어머니를 찾아가지만 그 앞에 펼쳐진 무수한 지뢰들. 당시 반공 영화가 주를 이루었던 분위기 아래 굉장히 낯설면서도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이 휴머니즘 가득한 영화는 <비무장지대>가 13회 아세아 영화제에서 비극영화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박상호 감독은 화가 났다. “왜 나는 보상 안 해주는데!”가 주 이유였다. 이 ‘보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박정희를 반드시 이야기해야 한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정권의 목표는 명확했다.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것. 그리고 한일 협정과 월남전 파병 등과 같은 국민적 반대가 높았던 사안들에 대한 설득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선전용 공보영화였다.
군부 정권은 1961년 [영화법]을 제정하고 난 뒤 문화 영화 의무 상영제를 펼쳤다. 한 마디로 정부 PR 영화를 의무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이게 북한과 다를게 뭐냐 싶지만 어쨌든 당시는 그랬다. ‘우수한’ 정부 PR 영화를 만들어 좋은 성적을 내면 국가는 외화수입 쿼터를 민간 영화사에 배정한다. 한 마디로 돈을 벌 수 있는 권한을 정부에서 부여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때 한국 영화의 인프라와 전반적인 질적 수준이 향상되었다. 영화관이 전국 읍내에 설치되며 1969년에는 한 해 1억 7천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했으며, 김기영의 <하녀>와 짧은 전성기를 맞이했던 이만희 감독의 <귀로>, <휴일> 그리고 김수용 감독의 <어느 여배우의 고백>, <안개> 등이 개봉했다.
이런 유수의 영화들 사이에서 국제적으로 성과를 낸 <비무장지대>가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하자, 박상호 감독은 공보부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것도 아주 정중히. 요는 문화영화 육성을 위해 극영화와 똑같은 조건으로 외화수입 쿼터를 배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1966년 12월 [영화법 시행령] 제11조에서는 우수영화보상 정책의 대상이 극영화뿐 아니라 문화영화 역시 포함하게 되었다. 또한 1968년에는 연 4회 분기별로 우수영화 선정을 실시해 우수 단편 문화영화 3편을 제작한 제작사에는 외산 문화영화 한 편 수입권을, 우수 장편 문화영화에는 외국 극영화 수입권을 준다는 정책을 발표했다.
이 정책의 주도는 물론 공보부였다. 공보부는 영화 제작 신고서가 들어오면 먼저 대본 심사와 시나리오를 1차적으로 검열하고, 영화 제작이 완료되면 필름 상영으로 2차 검열을 실시했다. 만약 수정할 내용이 보이면 감수, 제작회의, 찬동서 형식으로 영화의 내용과 대본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수정이 요구되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지는 1960년대. 군부 정권의 공보 영화 정책으로 일종의 ‘국뽕 영화’가 다수 제작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영화사적인 시도는 분명 관측되었다. 문화영화에서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고 수많은 스타 영화감독뿐 아니라 스타 배우들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1968년 이후 TV가 보급되며 민간문화 영화 제작 활황은 더욱 불을 지폈다.
*작가의 말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간 이준한]이라고 해두고 8일만에 업로드를 했네요.
자료가 너무 많아 글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1960년대는 군부의 선전 영화와 그 속에서 피어난 민간 영화사들의 노력들, 검열과 간섭, TV의 보급 등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한국에서 가장 크게 선전할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동시에 그에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영화를 제작하려면 시나리오부터 반공적인 요소가 있는지를 공보부에서 검열받아야 했고 완성이 되더라도 그 필름을 또 다시 검열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글에서 김기영 감독에 대해 한 줄도 되지 않는 설명을 한 것은 거의 죄악에 가깝습니다. '검열'과 '흥행'의 시대의 공통된 딜레마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다른 감독들이 새마을영화와 문예영화, 반공영화에 열중해 있을 떄 김기영 감독은 장르영화를 발견했으며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김기영이라는 좌표가 점찍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망령의 기억, 허지웅, 16p).
대체 해방 이후의 액션 영화에 대해서는 언제쯤 글을 작성할 지 저 스스로도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최대한 써 보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