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주익의 언덕에서, 여행의 시작을 만나다
짱구언니를 흔들어 깨웠다. 시차 때문에 그냥 두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계속 잘 기세였다. 피곤한 건 알지만 그대로 퍼져 있으면 시차를 극복하기가 더 힘들다. 빨리 나가자. 여행의 모든 계획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의 머릿속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올라 카드를 챙겼는지도 확인한다. 짱구언니가 로마에서 만행(?)을 벌인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미리미리 확인해두는 게 좋다. 여행을 오기 전 공부했던 지하철 노선도는 벌써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한 번도 타보지 않은 노선도를 외운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그래도 역사에 들어가 지도를 들여다보니, 공부한 내공이 슬쩍 나타나 낯설지는 않았다.
문제없이 가야 할 방향의 열차를 타고 거침없이 달려갔다. 뭐, 설령 잘못 탔다 해도 우리가 가진 카드는 120시간 무제한 승차 카드니까, 내렸다가 다시 타면 된다. 돈을 아끼겠다고 시간 계산하고 승차 횟수 세느라 스트레스 받느니, 약간의 투자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는 편이 훨씬 현명한 소비다.
바르셀로나 첫 여행지는 몬주익. L3 메트로를 타고 Paral-lel 역까지는 별문제 없이 도착했지만, 여기서 몬주익 케이블카 승강장까지 가는 Funicular(강삭 철도)로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구 선생님이 또 말썽을 부린다. 승강장 반대편까지 안내를 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못 잡고 헤매기 시작한다. 피곤하고 짜증도 나서 그냥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짱구언니가 기지를 발휘했다. “아까 사람들 저쪽으로 많이 가던데, 우리도 한번 가보자.” 과연, 짱구언니 말이 맞았다. 우리가 내린 L3 승강장에서 바로 Funicular 승강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똑바로 공부 안 하지!” 짱구언니의 핀잔이 이어졌다. 흐음… 저도 여기 처음 와봤거든요.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이라는 뜻이다. (Mont = 산, Juïc = 유태인) 이곳에 중세 시대 만들어진 유태인 공동묘지가 있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던 언덕으로 익숙한 장소다. 전체 높이가 177.72미터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이지만, 평지에 펼쳐진 바르셀로나 시내를 내려다보기엔 꽤 훌륭한 뷰 명소로 알려져 있다. 산에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는 걸어서,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Telefèric de Montjuïc)를 타는 것인데 우리는 미리 예약을 해둔 상태라 케이블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바르셀로나를 바라보며 걸어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행 파트너가 100% 반대할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케이블카 탑승이라는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일요일 오후라 그런지 몬주익을 오르려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았다. 예약을 해두었고 티켓도 가지고 있었지만, 예약자 우대 같은 건 없었다. 그냥 현장 구매자들과 함께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탈리아에서나 있을 줄 알았던 이런 비효율적인 시스템이 스페인에도 곳곳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기다리는 동안 미국에서 여행을 왔다는 젊은 부부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크루즈를 타고 지중해를 돌았고, 바르셀로나는 마지막 종착지라며 내일 출국한다고 했다. 우리가 오늘 도착해서 첫날이라고 하자, 갑자기 여행 팁을 마구 던져준다. ㅎㅎ 아놔. 무슨 파워 J가 들어간 여행 신분증이 있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어쨌든 정보(?)를 푸짐하게 받고, 좋은 여행 되라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다. 그들과 헤어지자마자 짱구언니의 명령이 떨어졌다. “지중해 크루즈 좀 알아봐.” 저기요… 오늘이 여행 첫날인데, 벌써 다음 여행을 알아봐야 하나요? 미국 돌아가서 알아보면 안 될까요?
케이블카라기보다는 곤돌라에 가까운 모양의 케이블카를 타고 몬주익 꼭대기로 올라갔다. 곤돌라에서 내려 얼마 걷지 않아 ‘몬주익 성(Castell de Montjuïc)’이 눈에 들어온다. 이름은 성이지만, 화려한 건물보다는 군사 요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안내판에 입장료 12유로라고 쓰여 있었는데, 매표소에서 두 사람이라며 카드를 꺼내려던 찰나, 일요일 오후에는 입장료가 없다는 반가운 말이 들려왔다. 개이득.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케이블카 줄 설 때 잠깐 느꼈던 짜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 성은 1600년대, 카탈로니아 혁명군이 스페인 국왕에게 맞서기 위해 지은 요새다. 물론, 혁명군은 이 성에 갇혀 항전하다가 결국 스페인 왕의 군대에 의해 궤멸당했다. 이후 1900년대 스페인 내전 시기에도 프랑코 정권에 반대하던 많은 카탈로니아인들이 이곳에서 고문을 받거나 사형당했다고 하니,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는 아픈 역사가 깃든 장소다.
그럼에도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바르셀로네타 항구와 바르셀로나 시내 전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우리가 앞으로 일주일 넘게 누릴 여행의 프리뷰를 보는 것 같았다. 다만 다음 일정 때문에 일몰까지 머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 성 안에는 1960년대에 만들어진 군사 무기 박물관도 있었지만, 오늘은 첫날이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케이블카도 탔고, 언덕도 올랐고, 성도 보고 풍경도 감상했으면 됐다.
이제 다음 일정을 향해 떠날 시간이다. 무릎이 튼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려가는 길이 항상 더 힘들다. 촘촘하게 박힌 울퉁불퉁한 돌길 덕분에 새색시가 시아버지 자리끼 떠다 드리는 것처럼 조심조심 하산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