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바르셀로나 여행: 개선문

붉은 개선문 너머의 방울방울 빛나는 오후

by 꿈 공작소

아무래도 계획을 너무 느슨하게 짠 것 같다. 카사 비센스를 충분히 느끼고 나왔는데 시간이 남는다. 그렇다고 흔들릴 내가 아니다. 여행 뒤쪽에 있던 계획들을 조금 당겨오면 된다. 뜨는 시간을 이렇게 채우고, 만약 마지막 날 시간이 남는다면 그때 가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면 그만이다.

59511e12-7600-4ee7-8c0b-44c36d7b5e1b.jpg?type=w966 출처: Architectuul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새로운 동선의 그림이 그려졌고, 나는 버스를 타고 Dipòsit de les Aigües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Les Aigües Library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Pompeu Fabra 대학교 안에 있는, 1874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축물이다. 역사적이면서도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바르셀로나의 조용한 랜드마크 같은 장소다. 버스를 갈아타며 어렵게 도착했건만, 문 앞에서 좌절을 맛봤다. 오후 3시에야 문을 연다는 표지판이 서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하루에 젤라토 하나씩은 꼭 먹겠다며 내가 약속했던 것처럼 구 선생은 하루에 한 번씩은 나를 배신하겠다고 약속한 것 같다. 분명 아침 8시에 열고 저녁 9시에 닫는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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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눈빛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제대로 안 알아보지” 하는 핀잔이 음성 지원으로 들리는 듯했다. 이럴 땐 빨리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수밖에. 다행히 근처에 개선문(Arc de Triomf)이 있었다.


붉은 벽돌로 위용을 자랑하는 개선문은, 전쟁의 승리를 기리는 다른 도시들의 개선문과는 다르다. 1888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의 정문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만도 30미터나 된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그 장엄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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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을 통과하면 Passeig de Lluís Companys라는 산책길이 펼쳐진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우타데야 공원(Parc de la Ciutadella)으로 이어지는데, 이 산책로에는 바르셀로나의 일상과 여행이 겹쳐져 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적절히 섞인 이 길 위로 햇살이 촉촉하게 내려앉아 조각조각 부서진 빛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마치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꿈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평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경쟁과 분주함으로 가득했던 여행의 초입과는 전혀 다른, 여유로운 공기의 한가운데에 내 몸을 담그고 있으니 마음도 한결 평화로워졌다.

그 고요를 간질이듯,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형 비눗방울을 만드는 아저씨가 있었고, 그 아저씨의 주위를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아마 이 산책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장 바쁜 사람이 그 아저씨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 장면을 부모의 미소를 띠며 한참 바라보았다. 짱구씨도 같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항구도시에서 온 작은 갑부답게, 무려 5유로를 꺼내 아저씨의 모자에 살포시 넣는다.


곁눈질로 힐끗 금액을 확인한 아저씨는 금세 짱구언니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특별한 비눗방울을 선물했다. 퐁퐁, 퐁퐁, 아저씨 손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비누방울들이 짱구언니를 향해 날아갔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도망가던 언니는 곧 “어차피 버린 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듯, 비눗방울을 온몸으로 영접하며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Carmel-Bunker-at-Sunset-Barcelona-Spain-00443.jpg?type=w966 출처: Happy to Wander

비눗방울 놀이는 끝났지만 아저씨는 우리에게 다시 다가와 바르셀로나에 꼭 가봐야 할 전망대가 있다며 ‘엘스 분커스 델 카르멜(Els Bunkers del Carmel)’을 추천해 주었다. 현지인들도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보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라고. 역시 뼛속까지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비눗방울 아저씨다. ㅎㅎ 5유로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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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 끝에는 Rius and Taulet 기념비가 있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한 사람. 바르셀로나의 재건과 만국박람회의 유치에 공헌한 시장 Francisco de Paula Rius y Taulet을 기리는 조형물이다.


이 길은 자연스럽게 시우타데야 공원으로 이어진다. 필립 5세가 지었던 요새 부지를 공원으로 재조성한 이곳은 도심 속 가장 사랑받는 쉼터다. 동물원, 식물원, 카탈루냐 의사당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우리는 다음 일정을 위해 입장료가 드는 곳은 생략하고, 무료로 열려 있던 온실만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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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 안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건 식물보다 짱구씨였다. 과일나무는 냄새로도 찾아내는 능력을 발휘하며, 이곳의 과실수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탐색해낸다. 정말 정글의 법칙 아줌마 특집을 만든다면, 내가 아는 피디에게 로비해서라도 출연시키고 싶을 정도다. 병만 족장은 비켜라. 짱구 족장이 나가신다.


온실 앞에 개인적으로 이 공원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인 세 마리의 용의 성(Castell dels Tres Dragons), 동물학 박물관이 있는데, 오늘은 문이 닫혀 있어 자연스럽게 카스카다 분수(Cascada Monumental)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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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는 예상보다 훨씬 화려했다. 특히 금빛 마차를 끌고 달리는 오로라 조각상(Quadriga de l’Aurora)은 전 세계 어느 조각보다도 찬란하게 느껴졌다. 중간에 비너스의 탄생도 조각되어 있었지만, 오로라의 눈부심에 살짝 밀리는 느낌이었다.


초기에 이 분수는 조각 하나 없는 밋밋한 구조였다고 한다. 당연히 현지인들의 불만이 이어졌고, 이후 6년 동안 보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젊은 시절의 가우디도 여기에 참여했지만, 당시 그는 아직 이름 없는 건축학도였기에 그의 역할은 분수의 수압 장치 설계에 그쳤다고 한다. 바깥에서는 그의 손길을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내부엔 그의 흔적이 조용히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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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 웃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바르셀로나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더 머물고 싶었지만, 다음 장소로 향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잠깐의 여유를 누렸던 이 경험은, 여행의 쉼표 같은 선물이었다. 잠시였지만 진짜 바르셀로나의 맥박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 그리고 그 틈에 깃든 평화와 환한 비눗방울처럼, 이 하루도 내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도록 맴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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