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 외출이 선물해 준 행복
보케리아 시장에서 저녁까지 먹고 호텔로 복귀. 오늘을 마무리하기 위해 씻고 다음날 동선 공부를 하고 있는데 짱구언니가 묻는다.
"오빠, 우리 스페인에 왔는데 플라멩코 댄스 안 봐?"
"응? 넌 무슨 제주도에서 봉산탈춤 공연 찾는 소리를 하고 있니? 플라멩코 댄스는 안달루시아 지방 (세비야나 그라나다가 포함된 스페인 남부지역) 민속예술이야."
"그래도 한 번 알아보지?"
그래, 알아보는데 돈이 드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 어머나. 바르셀로나에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었다. 심지어 당일 예약마저 가능했다.
우린 잠옷을 벗고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카탈루냐 광장 (Plaça de Catalunya)으로 향했다. 여행 중이니 가능한 일이지, 집에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탈 행위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광장을 지나며 밤을 즐기기 위해 방황하는 청년들의 대열에 중년 부부도 살짝 발을 얹는다. 짱구언니는 마누라를 잘 만나면 바르셀로나에서 플라멩코 공연도 볼 수 있다며 입술을 쭈욱 내밀고 생색을 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쇼핑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여행 계획이니 생색을 낼 만도 하다.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가 찾는 극장이 있었다. 극장의 이름은 City Hall (시청). 구 선생이 꼬장을 부리면 남쪽에 있는 진짜 시청으로 안내를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해야 해서 확인에 확인을 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니 붉은 조명이 켜져 있고, 공기가 무겁다. 아주 낙후된 도시의 삼류 카바레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물론 낙후된 도시의 삼류 카바레를 가본 적은 없다. 영화에서 본 느낌이라는 말이다. 공연 티켓에는 공짜 음료도 하나씩 포함이 되어 있다. 나는 콜라를 마셨고, 짱구언니는 샹그리아를 마셨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에게 술도 마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힘이다.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 위로 무희와 악사 그리고 가수들이 올라왔다. 여기서 무지함이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난 이 순간까지 플라멩코 댄스가 플라밍고 댄스인 줄 알았다. 그래서 스페인에 플라밍고가 서식하는지 궁금해 검색해 보기까지 했다. 이런... 알고 보니 공식 명칭이 플라멩코 댄스였다. 이는 안달루시아 지역의 집시들과 하류층민이 즐기던 음악과 무용이 예술의 형태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플라멩코 댄스는 보통 세 가지 요소: 춤(Baile), 노래(Cante)와 기타(Guitarra)로 이루어져 있고, 노래와 기타에 맞추어 댄서들이 애환이 가득한 처연하지만 열정적인 춤을 추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희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강렬한 감정과 열정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정작 이들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브로슈어에 간단한 프로그램 설명 같은 것을 포함해 배부했다면 참 좋았을 것 같다.
플라멩코 댄스는 컴파스 (Compás)라는 리듬 패턴이 굉장히 중요한데 보통 무희들이 캐스터네츠 (Castanets) 나 Palmas (팔마스-박수소리) 또는 Zapatead (사파테아드-구둣발 소리)로 박자를 맞추는데 이 공연에는 특이하게 굉장히 타이트한 셔츠를 입고 배꼽까지 보여가며 열정적으로 이름 모를 타악기를 연주하는 아저씨가 중심을 잡아 주었다. 또 노래는 인도 음악 같은 것으로 추임새를 넣었는데 짱구언니가 옆에서 자꾸만 '저 가수들 인도 사람 같아'라는 말을 하는 바람에 진지한 공연을 대하며 자꾸만 헛웃음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나중에 가수들을 카탈루냐 광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정말 인도 사람들이었다.
공연 중반, 한 무희의 독무가 시작되었다. 집시 옷을 입은 심각한 표정의 무희가 등장했다. 플라멩코 댄스라는 것이 원래 감정적이고 표현력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이 무희가 전하는 메시지는 너무 슬퍼 보였다. 뭔가 화가 난 것 같은 느낌을 주다가도 그 증오심을 주체하지 못해 좌절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변화되었다가 슬픔으로 승화되었다. 그녀의 강렬한 인상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죽음 앞에서도 강직한 신념을 가진 여장부 필라르를 연상케 했다.
2시간 정도의 공연을 통해 우리는 신내림 굿 같기도 하고, 부채춤 공연 같기도 한 여러 장면을 보았다 (나는 백일섭 아저씨일까?). 군무를 할 때는 파리 물랭루주에서 보았던 공연처럼 칼군무가 아닌 것이 훨씬 더 정감이 있었다. 애절한 노래와 현란한 기타 연주 거기에 무희들의 열정이 더해져 눈물이 날 정도의 감동적인 공연을 감상한 후 기립 박수를 아낌없이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보스턴에 있는 도난 사건으로 더 유명한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에 걸려있는 손 싱어 사전트의 El Joleo의 역동감에 반해 스페인에 가면 꼭 플라멩코 공연을 봐야지라고 다짐했었는데, 비록 안달루시아의 전통 플라멩코 공연은 아니었지만 참으로 감동적인 공연을 만난 것에 감사했다.
공연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그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젤라토 집에 들러 젤라토의 달콤함과 시원함의 힘을 빌려 흥분을 식혀야만 했다. 짱구언니가 던진 뜬금없는 질문에 시작한 밤 나들이. 참으로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던 밤이었다. 그렇게 바르셀로나에서의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