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킬리만자로 국제공항을 떠나 차로 세 시간가량 달려 베이스캠프가 있는 카라투에 도착했다. 우리가 머물 베이스캠프의 공식 명칭은 YWAM Karatu Outreach Centre (예수전도단 선교 센터)였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이끌려 밖으로 나섰다.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참으로 평화로웠다. 장장 26시간의 비행과 세 시간의 육로 이동으로 몸은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너무도 편했다. 은혜로 덮이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마저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무너져 가는 헛간마저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 헛간은 선교사님이 처음 카라투에 도착해서 짓고 살던 집이었다 했다. 선교사님이 카라투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을 당시만 해도 카라투는 5,000명도 살지 않는 낙후된 오지였다고 한다 (물론 아직도 카라투 번화가는 70년대 시골 느낌이 난다). 선교사님이 우물을 파고, 집을 짓고, 정원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며 발전하기 시작해 지금은 카라투 지역 인구가 거의 3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덕분에 선교사님 부부는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소위 말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아직 열 살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절, 한참 삶에 치열해야 할 30대의 나이에 이 부부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도 생활하기도 불편하고, 문화 시설 등이 부족한, 당시 선교지로도 그리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 탄자니아라는 미지의 땅으로.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그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 굉장히 선별적이고 조건적으로 대답을 할 것 같은데.
나의 궁금증에 대한 선교사님의 대답은 참으로 간단했다. 어렸을 적 기회가 있어 아프리카로 선교 여행을 왔었고, 그때 아프리카에 대한 심장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어 주셨다. 이후 그는 자라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에 있는 교회의 도움으로 파송을 받아 아버지께서 가라고 하셨던 아프리카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도 없고, 집도 없고, 언어 소통도 잘되지 않는 곳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구입한 땅에 나무를 심는 것이었다. 밭을 매고, 식물을 다룰 줄 아는 시골 출신 사모님을 만나 결혼한 것도 미리 준비해 놓으신 뜻 안에 있었다고 고백했다. 물이 없어 세수를 사흘에 한 번씩 하더라도, 먹을 것이 없어 바나나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허다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루실 선한 계획들을 기대하며 버텼다고 했다. 또 그리하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섬기겠다는 순종의 믿음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어떤 미국 대형 교회 목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잘 되는 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축복이 금쟁반에 올려져 우리의 손에 쥐어지는 삶도 아니다. 주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불 가운데로 걸어가더라도, 폭풍 속을 지날 때에도, 때론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도 신실하게 날 지키시는 주의 손길을 경험하는 삶이다. 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 하나만 의지하며 주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선교 여행 전 다리가 아파 휠체어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이 물으시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너를 용납한 것처럼 너도 다른 이들을 용납할 수 있느냐? 내가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분명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주님은 내가 무엇을 이루느냐보다, 어떤 자리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며 함께 걸을 수 있느냐를 물으신다는 사실이다. 편안함이 아닌 순종으로, 확신이 아닌 믿음으로, 결과가 아닌 관계로 나를 부르신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으로 내 삶에 머문다. 그리고 나는 완벽한 대답 대신,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해 본다.
“주님,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