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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자 까 Jan 14. 2024

사랑에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별명이 있다.

어릴 적 친구 따라 간 여름성경학교에서 이런 이야길 들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 내가 먹었나이다 /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 ‬‬•••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신은 인간과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 창조 후 바라본 모든 만물은 심히 보기에 좋았다. 그들에게 바라는 건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이 두 가지뿐이었다.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 사랑했기에 만물의 영장이라는 영광을 주고, 사랑으로 모든 능력과 권세를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배신했다.


이후 신은 노아를 통해 인간들을 회개하도록 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을 외면했다. 수천 년간 신은 인간에게 배신당했다. 그 내용이 고스란히 경서에 담겨있었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된 후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 신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신은 전지전능한.. 무려 창조주 위치에 있는 존재 아닌가? 인간을 왜 계속 믿는 걸까. 모두 다 쓸어버리고 새로 만들고.. 배신하면 또 쓸어버리고.. 이러면 쉬울 텐데 왜 인간들에게 자꾸 기회를 주는 걸까?’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신의 대처가 답답했다. 수천 년간 당해오고도 모르는 걸까? 하며, 나랑 안 맞는 영역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서른 가까이 된 나는, 처음으로 누군갈 사랑해 보았다. 스무 살 중반엔 가족, 후반엔 친구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었는데.. 서른을 앞둔 시점에선 이성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다.


그토록 사람들이 열광하던 로맨스엔 아무런 감흥이 없고 느와르 장르에만 열광을 하던 내가, 처음으로 로맨스가 와닿고 공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들이 서로 막 싸운다. 그러다 부둥켜안고 울더니 눈물의 키스를 한다. 그걸 본 과거의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싸우던 거 마저 마무리는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하던 나에게 엄마가 던진 한마디. “넌 사랑을 안 해봐서 모르는 거야”


뭔 소린가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의 나는 그 장면이 엄청난 명장면이라 여겨진다. 미움과 증오,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을 덮을 만큼 서로에 대한 사랑.. 블라블라. 아하 -.


어렴풋이 알 것 같던 사랑이란 감정이 확실히 와닿았던 스무 살의 끝자락. 상대가 나에게 상처를 주어도 그저 행복을 빌어주고 싶고, 설령 그가 먼저 나를 떠난다 해도 그의 앞길엔 더 큰 사랑의 행위와 벅찬 감동이 함께하길 바라는 그런 마음.


누군갈 사랑했던 마음을 정리하며 ‘그럼에도 상대가 연약한 마음이 단단해지고, 언젠가 단단해졌을 때 올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하며 태도에 대한 정죄보단, 고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이 크게 들었던.. 만족스러운 정돈의 행위.


감정의 해갈과 정돈을 하던 새벽, ‘아! 누군갈 사랑한다면,  나한테 잘못한 거와는 별개로 언젠가 깨달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그저 행복을 바라고 응원하는 마음이 드는구나. 이게 신이 인간을 사랑했단 증거인가?’라는 깨달음이 나에게 온 것이다.


신은 인간을 정말 사랑했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나는 궁극의 영역에 좀 더 가까워졌다. 내 인생에 마지막 숙제가 풀리던 순간이었다. 나의 감정은 한층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졌다. 행복을 느낀 순간이었다.


나는 조금 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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