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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Aug 19. 2023

너와 한몸이 되고싶어

여러분에게 가장 부끄러운 순간은 언제였나요?

어제는 이슬아 작가님의 책을 읽는데, 정말 저항없이 피식 웃어버렸다. ‘이걸 이렇게까지 써도 되나?’ 하는 정도의 솔직함이 그녀의 강점이다. 어느날은 그녀가 남자의 집에서 단둘이 영화를 보고있는 중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가 많이 급했는 지 갑자기 상체탈의를 하더니 그녀에게 키스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고서는 그녀에게 귓속말로는 ‘너와 하나가 되고 싶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의 급발진에 나도 온몸을 비틀어 그 충격을 겨우 이겨내었다. 그의 급발진을 보고 있자니 나도 과거의 너무나 많은 부끄러운 기억들이 생각나 가만히 평온하게 앉아있을 수 없었다. 가장 가깝게는 군 후임 5명과 밥을 먹고는 그걸 사주지 못하고 정산방에 미안하다고 글을 올리는 내가 떠올랐다. 내가 카드를 긁었지만 몇 시간이 지난 후 고민하다 형이 밥을 사주지는 못해서 미안하다고 부끄러운 글을 썼다. 사실 그리 미안하지는 않았으나, 미안하다고 글을 올리며 돈을 받아내는 내가 조금 부끄러웠다.


생각해보니, 요새는 부끄러운 일들이 좀 많았다. 엊그제는 하루 중 가장 뜨겁다는 1~2시에 풀을 깎는 일을 했다. 매번 사무실의 시원한 에어컨을 쐬면서 타닥타닥 문서를 작성하는 내게는 이 더위 아래서 일을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까짓 일을 하면서는 나는 참 실수도 많이 했다. 연료통에 기름을 넣으면서는 넣는 양보다 흘리는 양이더 많아 꾸중을 들었다. 풀을 깎는 것은 내게는 너무 생소한 일이라, 쉽게 잘릴 길 없는 거센 풀들을 괜히 원망했다.  

그리고 어느 때에는 같이 일하는 하사님께서 분명 건물 뒤를 제초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뒤’가 어디인지 찾지 못해서 건물 옆을 제초하며 1시간이 지난 뒤에야 여기가 내 구역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부끄럽게 히실히실되며, 하사님 옆에 앉아있었다. 그가 장난섞인 말로는 내게 ‘훈민이는 참 곱게 자랐나 보다’라는 푸념을 했다. 예전에 그런 말 들었으면 참 기분이 안좋았을 텐데 많은 실수를 한 직후라 저항없이 끄덕거린다. 아니, 오히려 더 나한테 그런 욕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더러운 일이든 힘든일이든 잘 피해 살았다. 그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자 (그런 것들을 피해다니는 것들)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 돈이든 능력이든 내게 부족한 것들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 때마다 생각을 달리한다. 날 이렇게 곱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내 주위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을까 하고. 우리 불쌍한 엄마 아빠 할머니 선생님들 등등 소중한 사람들이 생각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것이라고 몇번이고 다짐했던 그 24살의 내가 겨우 그까짓 제초 하나에 굴복하여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부끄러운 날이 이어질 때면, 이제는 내가 떠나버린 대대의 밝은 친구들을 보러 간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얘들이랑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아니다 조만간은 그 소중한 친구들을 모아 기꺼이 밥 한번 사줄 수 있는 성숙한 어른으로서의 나도 생각한다. 내가 일병일 때 이병이던 그들은 어느새 6개월을 밟아 일병이 되었다.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모습들도, 그래도 선임이라고 크고 밝게 인사해주는 그들의 눈을 나는 언제나 보고 싶다. 저항없이 웃을 수 있게 해준 그들에게도 부끄러운 나를 알게 해준 짤린 풀들에게도 감사한다. 물론 이 글을 쓰게 해주게 해줬던 이슬아의 그 남자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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