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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Aug 15. 2023

점프

태어나려는 이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조던피터슨은 그의 책 ” 12가지 인생의 법칙“ 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전지전능하고 어디에나 존재하는 절대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절대자에게 없는 게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 참 어이없고도 답이 없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모든 걸 가진 신이 우리 같은 하찮은 인간의 어떤 것을 부러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종류의 질문에 생각을 더해가던 어느 날, 우연히 내게 다가온 한 영화는 그 질문에 힌트를 주었다. 다니엘 콴 감독의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멀티버스” 개념이다. 미래의 어떤 세계에서는 ‘점프 버스’라는 기술을 이용해 다양한 멀티버스들을 미리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여러 멀티 버스에서 ‘나’였던 혹은 ‘나’ 일 수 있었던 여러 존재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메인 빌런인 ‘조부 투바키’는 그중에서도 가장 점프버스 능력이 뛰어난 존재였기에 그녀는 그녀의 가능성을 모두 멀티버스에서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탁월함’ 때문에 모순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점프’ 해야 할 곳도 해야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로 비유되는 베이글로 빨려 들어가 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를 통해 얻은 그 책의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한계’였다. 어떤 존재가 이미 모든 것이고 어디에도 있다면 (everything, everywhere) 굳이 가야 할 곳도 굳이 뭐가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 ‘한계’라는 건 고마운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한계를 직시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자신이 어디까지 점프해야 하는지 계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점프를 위한 방해물은 없는지, 점프 후 다시 발 디딜 곳은 있는 지를 계산하고는 그 누군가는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도 누구는 흔들리는 발판을 밟아 저 멀리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우리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점프는 나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했다. 어릴 때는 우리 집 소파가 왜 그렇게 커 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좁은 소파에서 형과 나는 펄쩍펄쩍 뛰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었다. 그렇게 신나게 뛰다 지쳐 앉아있으면 언제나 같이 아랫집 노여사가 초인종을 누른다. “훈민 엄마 얘들 뛰게 놔두지 말라니까요. 아래에서 다 들려요 ” 밥을 하다 말고 뛰쳐나온 엄마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우리 장난꾸러기들을 혼냈었다. 또, 초등학교 때 영어학원을 가는 길에는 아저씨가 트램펄린 장사를 하고 계셨다. 단돈 1000원만 내면 1시간 동안 신나게 트램펄린을 탔다. 트램펄린에는 이상한 매력이 있었다, 내가 힘을 준 만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 때에는 더 높은 곳에서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큰 벅참과 낮은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구경하게 된다. 그 시간만큼은 내가 오늘 숙제를 안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학원에 가면 호되게 혼날 것이라는 현실에서, 다시 내일 또 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혼나면서 우리는 ‘뛰는 행위’ 자체를 멈추지 못할 만큼 사랑했었다.


이사를 하면서 트램펄린이 딸린 동네를 마지못해 떠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점프는 내게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점프는 다른 이들보다는 더 높게 올라가기 위한 경쟁수단이 될 뿐이었다. 그렇게 그저 다른 이들보다 더 높게 뛰기 위한 나의 처절한 노력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나에게 남아있는 건 대학 합격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무성영화처럼 색채 없게 흘러간 시간들이었다. 그 깊은 허무감과 공허함을 생각하면, 가끔 뉴스에 들리는 수능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거릴만하다.


우린 왜 그 많은 하늘의 공간을 두고 점프할 자리를 다투고 있는 걸까? 불행했던 어린 시절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은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념은 마치 소크라테스가 인간이기에 죽는다는 정언명제와 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누구도 나에게 나를 챙기는 방법이라던가, 좋은 친구를 사귀는 법 같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다. 만나는 선생님에게는 더 공부를 독하게 하는 법에 대해서 엄마 아빠에게서는 공부를 게을리했을 때 겪게 될 일들에 대해 배웠다. 그렇게 한 인간은 대학=성공=끝이라는 공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하는 교육이 오히려 우릴 심하게 망가트리고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점프를 참 사랑하는 나였는데 그 당시에 난 이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은 우리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도 전에 여러 제한된 멀티버스를 우리에게 강요한다. 공부를 못해서 실패한 나의 모습과 공부를 잘해서 성공한 그 이원화된 세계를 말이다. 그 이상을 기대할 것 없는 세상에서 우린 ‘조부투바키’가 그랬던 것처럼 허무함과 끝없는 ‘무’를 맞이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우리들의 실패, 절망의 이유이자 2030들이 겪는 고통이다.


나를 그런 베이글에서 빼내주었던 건 수능이 갈라놓았던 두 이원화된 세계의 파괴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려야 한다 “고 주장했던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그 세계를 깨트리고 나온 나는 웃음도 희망도 많은 아이였다. 이제 더 이상, 종이에 찍혀 나오는 성적 따위가 나의 미래를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전히 점프는 이전과 같이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누구보다도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에게 더 높은 곳을 경험하게 해 주기 위함이었다. 또, 결정적으로 더 이상 나는 단일한 성공이라는 목표를 위해 발돋움하지 않게 되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발돋움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마치 어린 시절의 트램펄린에서 즐겁게 놀았던 나처럼 그저 ‘즐거움’을 위해 뛰기도 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빌런 조부 투바키와 같은 신적인 존재들에게는 없는 ‘한계’에 다시금 고마워진다. 우린 앞으로 어떤 것도(에브리씽) 어디에도(에브리웨어)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불룩 튀어나온 내 배도, 삐죽삐죽 제멋대로인 내 머리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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