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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Oct 02. 2023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연락했다”

추석아침에 차가운 그는 그런 연락을 남겼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달려야 한다.” 몇년 전만 해도 블로그에 이런 오글거리는 말 조차 눈까딱하지 않고 올리던 나였는데 , 용기 있는 과거의 나에게 매우 감사해졌다. 생각해보면 조금 강력하긴 하지만 그리 공허하지는 않던 구호라는 걸 이제 깨닫는다. 본디 인생이란 권태와 고통 두 정착점을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인생이 조금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것들을 생각하며 추석 연휴를 권태롭게 보내던 나는 보름달같이 부풀어버린 내 배를 만지며내일은 좀 덜 권태롭지만 더 고통스럽길 바라며 시간을 보냈다.


그 다짐과는 반대로 더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추석 날 5년간 연락이 닫지 않았던 내 고 3 담임선생님께 선톡이 하나 와있었다. “추석연휴 잘 보내고 있니? 언제 한번 연락한다고 했는데 못했네 ㅎ 갑자기 네 생각이 나더라구나 연휴 잘 보내고 또 연락줄께~” 그는 언제나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번도 그가 다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었다. 오히려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불안에 떨며 무너지는 나를 그는 냉정한 얼굴로 꾸짖어 주었던 사람이다. 내가 강한 사람이 아니라, 아마 그 또한 강한 사람이 아니였으면 분명 나는 고3을 방황하며 보냈을 거고, 또 먼길을 다시 돌아와야 했을 것이다. 날 붙잡아줬던 그였지만 내 머리속에는 그의 냉정함과 무심한 얼굴만이 남아 내 기억속에는 흐릿해졌던 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선톡을 남겼던 것이다. 길지는 않지만 정갈한 문장으로 나를 감동시킨 것이다. 괜히 눈물이 핑 돌아 주책이라며 나를 나무랐는데 며칠 후에 다시 생각해보니, 어리고 부족했던 그 시절의 나를 1년간 잘 붙잡고 있어주었던 그를 너무 무심히 여긴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나 보다. 그런 그에게 너무 늦게 게다가, 답장으로 연락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큰 죄책감으로 남았다.


며칠전에 estj인 누나에게 감성 에세이 같은 걸 선물하고서는 욕을 한바가지로 얻어 먹고나서는 성묘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가서, 좀 더 사려깊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또, 뭐든 내가 더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난 아직도 여전히 내 능력만큼보다 그리고 내 됨됨이보다 더 받는 사람인 것 같다.


급한 마음으로 이러저러한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은 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게 도와준 사람들이다.) 어색한 추석인사를 건네며 다녔다. 어떤 이에게는 답장이 오지 않았지만 , 내 형식적인 추석 인사에도 반갑게 화답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걔중에는 기프티콘을 보내거나 세뱃돈으로 마음을 전달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다짐한 이후로, 마음이든 선물이든 주는 일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주는 사람이 되자라고 다짐한 순간, 나는 더 많은 애정과 선물과 마음을 선물받아왔다. 그래서 주는 사람이 되는 건어려운 일인걸까? 내 주변에는 가만히 잠자코 받는 사람들이 없었기 떄문이다.


아마 내년에도, 나는 할머니를 만나서 받는 사람보다 더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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