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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자까 Apr 06. 2024

이 쓸모없는 인간들아.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창조성이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창조적인 인간은 글을 쓰거나 명화를 그려내는 화가를 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현대의 인간의 얕은 사유능력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미에서 창조성을 말한 것이다. 인간이 가진 얕은 사유능력, 서서히 작아지는 집중력으로는 사물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하더라도 우리는 그 일면만을 본다. 어떤 사람을 볼 때도 그 태도는 동일하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볼 때  몇 가지 적은 기준을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좋은 대학을 나왔는가?  그렇군 그는 똑똑한 사람이구나. 얼굴은 충분히 잘생겼는가? 그렇군 그는 적당히 인기가 있겠구나. 몸은 충분히 건장한가? 흠 운동도 어느 정도 즐기는 사람이구나. 그런 판단 기준으로 어떤 이는 , 적당히 똑똑하고 몸이 좋은 훌륭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이런 적은 판단 기준으로, 사람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현대 사회에서 꽤 합리적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언제나 분주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마주치고 넓고 얕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우리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을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고립과 외로움을 낳을 것이다. 각각의 인원을 자신의 기준에 맞게 끼워 맞추는 과정을 통해 그가 마주하는 세계는 명료해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어제는 나를 좋게 봐주는 후임과 샤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형은 충분히 성숙하고 공부도 잘하고 몸도 열심히 가꿔서 튼튼한데 , 나는 매력도 없고 공부도 못해서 형이 너무나 부럽다고. 기분은 좋은 이야기 었지만 결국 그는 나를 그의 판단기준에 맞춰 재단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일 것이다. 그러면서 형이 자신의 나이대가 되었을 때는 어떤 판단을 했을 것인지 물어보는데 나는 말문이 살짝 막혔다.  나는 그가 생각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아닐뿐더러 , 내가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설명해 주더라도 그는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가 나 같은 모습이 되더라도 그가 행복할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런 깨달음으로 더 이상 누군가를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느냐는 말에는 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대라는 공간은 더 분업화되고 사람들과는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조직에서 아웃사이더는 더 심한 대우를 받는다. 어떤 후임은 일을 하다가 부상을 입어 더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되었고, (잘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빌리자면 ) 그의 부상은 그의 업무를 회피하려는 잔머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 소문이 돌자 그는 누군가들에게는 갱생 불가능한 쓰레기가, 개새끼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번 어떤 이들의 판단 기준에서 ‘쓰레기, 개새끼’가 된 후에는 그의 서글서글한 태도도 선임들을 대하는 깍듯한 인사도 더 이상 그 가치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된다. 그런 들리는 판단 기준들로 나 또한 그들을 판단하고 나서 잔뜩 화가 난 이후에 난 그들을 더 배제하려 입을 열었다. 긴 연설문을 적어냈지만,  대충 미안해하라고 반성하라고 이 사회는 냉정하니 너네들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내용들이 적혔다.


 사실 아직도 난 그들을 알지 못한다. 그가 실제로 일을 빼려 이른바 “속임수”를 하는지 , 아니면 실제로 아픔에 시달리면서도 그를 괴롭히는 편견에 묻혀버린 것인지. 하지만 나는 에리히 프롬이 남긴 ‘창조성’과 인간의 얕은 사유능력에 대한 일침을 보며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인정하게 되었다.  그를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의 부족으로 인해 난 그 친구를 매도해 버렸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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