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린 내가 있었다
시간은, 말그대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 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고통받았고, 잠이 오지 않는 세월에 살고 있었다. 사상 두번째 계엄이 이루어졌던 날, 나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진을 뺐고, 다음날도 그랬다. 나는 먹고사는 문제를 생각했다. 그 다음날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은 우연히 여의도를 지나쳤다. 탄핵과 윤석열과 내란과 감옥 그 외의 분노에 가득찬 것들이 적힌 빨간 팜플렛을 들고 사람들은 비장한 모습으로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다. 여의도를 지나 여의나루, 종로 3가를 지나쳐오며 나는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 순간 내게는 미뤄놓았던 과제들이 떠올랐다. 이주 남짓한 시간 후에 치게 될 중간고사도 생각났다. 내가 사는 녹번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며 나는 추위에 떨면서도 한손으로 휴대폰을꺼내, 뉴스를 보며 조금은 울컥하며 몇일전 한강 작가님의 '소년이 온다'의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양심이 부족한 나는 아마, 군인들이 총을 쏘고 사람들은 총에 맞고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서 가장 먼저 숨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역사의 한 쪼가리에 조그만 내가 있었다.
다음날, 내가 수강하던 '한국 정치론' 수업에서 한 학생은 손을 들어 말했다. 그는 윤석열이 밉다고 했다. 이재명 좋은 꼴 시켜준 것이 기분 나쁘다고 했다. 계엄을 할거면 제대로 했어야 한다고 분노했다. 그 나름의 분노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그저 계엄의 총구에 죽어가던 그 누군가의 시민들의 합동 장례식장에 와서 폭도라고 분노하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폭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사회학과였고, 걔는 정치외교학과였다. 그 차이에서 오는 지식과 말의 구조적 신뢰는 나를 압도하는 듯 했다. 반박할 말을 찾다가, 괜히 폭도같은 게 될 것 같아, 개딸이 될 것 같아 입을 닫았다.
몇일 후에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3살 아이도 죽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스타에 스토리로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나는 이제 그런 고통들을 외면하기로 한다. 뉴스도 더이상 보지 않기로 한다. 앞에 놓인 것들에 집중하기로 한다. 왜냐면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서는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더 수업에 참여시킬 것인지 고민하기로 한다. 이미 손상된 피부가 불만이라 피부과에도 들리기로 한다. 배달음식 따위를 시키며 불러버린 배를 보면서 내일은 운동을 하기로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 따위다. 이 세상에 단순히 버티며 붙어있는 25살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외면하기, 하루를 조금 덜 기쁘기, 더 열심히 살아가기.
그 뿐이었다.
5개월동안, 나는 혼자있는 시간이 많았다. 불필요한 시간을 줄였다.
아침에 일어나 카페로 출근하고
낮에 학교로 출근하고
밤에 학원으로 출근했다.
가끔 행복하려, 날 좋아해줄 사람도 찾으러 방황하기도 했다.
되려, 외로운 마음도 있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외로움은 바쁨에 희미해진다.
그 바쁨에 한 구절도 쓸 수 없었지만, 덕분에 나는 한 층 더 잘 버티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또, 덜 부끄러운 시간들이 있었다. 이번 년도가 지나면 다시 mbti 를 재봐야겠다.
혹시 모른다. 내 mbti 가 intp 정도로 변해있을지, 내년에는 좀 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봐야지
더 도전해봐야지.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일단 해보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