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고가 없기를 기도할게’
별 기대가 없어졌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가족들과 함께가 아닌 해외여행은 6개월 전 일본여행이었다. 정말 오롯이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친구가 없었고, 친구가 있었더라도 홀로 무엇이든 해보자는 고집으로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여행자로서, 유별난 행위는 다 해보았던 것 같다. 브이로그를 찍어보자고 케리어를 들고 공항에 가는 길도 영상에 담아보기도 하고, 공항에서 사람을 붙잡고 사진을 찍어보기도 하고, 가끔 용기가 나지 않을 때는 애플워치 사진 기능을 이용해서 나를 담아보기도 하였다. 일본에 가서도 유별난 관광객같이 행동했다. 유명 관광지를 가면, 사람들을 붙잡고 사진을 요청하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낯선 곳에서는 특히 부끄러움을 잘 모른다) 게다가 셀프캠으로는 내가 가는 곳마다 영상으로 남겼는데, 다시 볼 때마다 부끄러워 죽을 느낌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거울을 보거나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이 가장 잘 나오는 방향으로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얼굴을 돌린다고 한다. 평범한 얼굴이 조금이라도 잘 나오려 필사적으로 얼굴을 돌리는 장면만 남아서 괜한 비참함만 남았다.
비참함을 마음에 두고서는, 이번 여행에서는 별 행동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다시 생각해 보니 요새는 무언갈 하지 않는 것보다 너무 많이 하는 것들 때문에 고역을 겪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공항으로 가는 여정을 찍지 않았고, 내가 휴게소에서 먹는 것들 따위를 찍지 않았고 그냥 얌전히 공항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여전히 비좁고 답답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겠습니다.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중국 항공이었던 내 비행기는 영어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를 차례로 방송했는데 그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비행기는 그렇게 높은 곳으로 향했고, 그때 나는 가득 불안한 마음으로 H가 인스타 답장으로 남겨놓은 ‘항공사고 없기를 기도할게’라는 문구를 속 가득 깊은 곳에서 놓지 않았다. 가끔은 그런 예의상 한 이야기들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륙부터 착륙까지 한숨도 못 잤다. 대신 엄마에게 ‘여행 가는 애가 책은 뭐 하러 가져가냐는’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꾸역꾸역 챙겨 온,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펼쳤다. 아내가 가족들의 압박에 못 이겨, 손목을 그을 때 즈음 착륙 안내방송이 나왔고 나는 몇백만 분의 몇백만 분의 확률로 안전하게 대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야’ Y는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카톡을 보내놓은 것 같았다. 이 드넓은 낯선 광야에 내가 아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눈물 나도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Y는 내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등학교 친구들 중 한 명이다. (사실 ‘중’이라고 했지만, 내게는 딱 2명뿐이 남지 않았다) 우리 학교에 전학을 온 후에 친해진 이 친구는 갑자기 특목고를 가면서 헤어지고 나서 한국외대를 입학해 중국어를 배우더니,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떠나기도 했고 수료 후에는 미지의 땅인 대만으로 와 학업을 하고 있다. 혹시나 역마살이 껴서 이후에도 오랫동안 외롭게 떠돌아다니지는 아닐까, 걱정이 앞서는 친구이기도 하다. Y를 오랜만에 보는데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중국어는 실력은 조금 더 늘어서, 내 표를 자연스럽게 사주고 차가 언제 오는지 스스럼없이 물어봐준다. 가까운 터미널에 내려, 택시를 타고 Y의 기숙사로 간다. Y의 기숙사로 가며 나는 Y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본다. 이를테면 ‘대만 달러로 100달러면 한국에선 얼마지?’나 ‘잘 먹었습니다는 중국어로 뭐지’ 같은 것들이다. 그런 것도 안 알아보고 왔냐며 투덜대며 Y는 친절히 모든 걸 대답해 주고 택시는 기숙사에 도착한다. 그렇게 첫날은 한국의 공기만큼이나 대만의 씁쓸한 공기를 맡으며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