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의 대가가 조금은 더 온기로 채워졌으면...
나는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많은 여성들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지, 왜 불편함을 감수하며 맞추는 선택을 ‘현실’이라고 부르는지, 왜 바뀔 가능성조차 생각하지 않은 채 안정이라는 이름의 구조에 자신을 눕히는지.
처음에는 화가 났다. 지금은 충분히 스스로 설 수 있는 시대인데, 왜 여전히 누군가의 조건에 기대는 삶을 선택하는지 답답했다. 그 선택이 개인의 삶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기준을 조금씩 낮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을 조금 바꾸자, 보이는 것이 달라졌다.
문제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가 아니라 "왜 그런 선택만 가능하게 만들어졌느냐”였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용기를 냈을 때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관계를 떠나면 혼자가 되고,
기준을 세우면 까다로운 사람이 되고, 맞서면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된다.그리고 그 대가는 온전히 개인이 떠안는다. 이 사회는 오랫동안 용기를 개인의 미덕으로만 요구해왔다. 하지만 용기를 냈을 때의 손해를 함께 나누어 감당해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는 선택이 아니라 도박이 되었다. 그 앞에서 타협은 비겁함이 아니라 상처를 최소화하려는 생존 전략이 된다.
어떤 관계들은 이렇게 설계된다. 한 사람의 세계가 중심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간다. 갈등은 최소화되고, 질문은 줄어들며, 관계는 조용히 유지된다. 이 구조는 어떤 사람에게는 안정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나를 흔들지 않는 관계는 곧 나를 포함하지 않는 관계가 된다. 내 생각은 조정 대상이 되고, 내 감정은 관리해야 할 변수가 된다. 사람은 곁에 있는데, 정작 나는 혼자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이런 사랑 안에서는 나는 반드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속상하다. 여성이 스스로를 줄이는 선택이현명함이나 현실 감각으로 포장되는 것이.그러나 이제 분노의 방향은 분명하다. 그 분노는 어떤 여성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 선택을 하게 만든 구조, 용기를 너무 비싸게 만든 사회를 향한다. 개인을 탓하는 분노는 소모된다.
하지만 구조를 겨누는 분노는 방향을 만든다. 나는 그 방향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나는 편안해지기 위해 나를 줄이는 사랑을 선택하지 않겠다. 누군가의 세계 안에 들어가 조용히 살아남는 관계를 성공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사랑은 서로를 지켜주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서는 사랑이다. 각자의 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 불편을 감수하며 나란히 서는 관계, 떠날 수 있지만 머무는 선택이 존중되는 관계, 안정이 아니라 존엄을 기준으로 삼는 사랑이 기준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선언이다.
나는 안다. 모든 사람이 지금 당장 이 선택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동시에 나는 믿는다. 이 선택이 욕심이 아니라 기준이 되는 사회는 분명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묻는다.그리고 묻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
왜 우리는 용기를 이렇게 비싸게 만들어야 했는가. 그리고 언제쯤, 존엄이 위험이 되지 않는 선택지가 당연해질 것인가. 이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내가 선택한 삶의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