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존중되었으면..
맥주 한 잔에 간단한 안주를 시켜 놓고 천천히 반주를 하고 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았다. 시끄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는 밤이었다.
그때 옆자리에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앉았다.
아마 썸을 타는 사이 같았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들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원치 않아도 대화가 계속 귀에 들어왔다.
남자는 자신의 직업 이야기를 했다. 회계사라고 했다. 어떤 법인을 세웠고,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바쁘고, 얼마나 중요한 일을 맡고 있고, 얼마나 잘 나가고 있는지. 계속 ‘자기 능력’에 대한 설명이었다.
여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와 대단하시네요.”, “진짜 멋있어요.” 남자는 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식었다. 멋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피곤해졌다.
왜 굳이 저렇게까지 설명해야 할까. 왜 굳이 저렇게 증명해야 할까. 마치 듣고 싶어서 듣는 이야기가 아니라
‘들어줘야 하는 이야기’ 같았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물론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아, 저건 자랑이 아니라
불안이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나는 요즘 사람들을 두 부류로 보일때가 있다.
성취로 자존감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존재로 자존감을 만드는 사람.
성취 기반 자존감은 늘 바쁘다. 계속 설명하고, 계속 보여주고, 계속 증명해야 한다. 얼마를 벌었는지, 어디를 나왔는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해서
조건으로 대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자연스럽게 서열이 된다.
더 번 사람은 위, 덜 번 사람은 아래. 더 성공한 사람은 존중, 그렇지 않은 사람은 투명.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스펙이 된다. 그 구조가 나는 늘 불편했다.
반대로 존재 기반 자존감은 조용하다.
굳이 말하지 않는다.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굳이 증명하지 않는다. 그냥 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길을 걷고, 자기 삶을 자기 속도로 산다.
누가 더 위인지 아래인지 별로 궁금하지 않다. 각자 인생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도 ‘이 사람이 나보다 위인가’가 아니라 ‘이 사람이 편한가’를 먼저 본다. 나는 내가 이 쪽에 가깝다는 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돌이켜보면 최근에 알게되었던 사람도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만날 때 내 스펙을 물었다.학벌을 묻고, 부모님 직업을 묻고, 유학 배경을 묻고.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어떻게 자수성가했는지. 그때는 그냥 ‘자기 이야기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했는데,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설명이 아니라 방어였던 것 같다. 물론 나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나를 알아가려는 질문보다는 자기 위치를 확인하려는 질문.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굳이 그런 걸 묻지 않는다.비교 대상일 때만 묻는다.
나는 비교라는 개념이 없던것 같은데, 다시 회상해보면 그는 계속 비교를 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하다. 나는 그냥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인데 그는 나와 나란히 서 있는 게 아니라 위아래를 재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기 능력을 크게 말하는 사람보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사는 사람에게 더 끌릴 것 같다. 조용한 사람은 티가 잘 안 난다. 하지만 오래 남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나는 사람은 대개 그런 사람이니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냥 존재만으로 충분한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을 가졌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어떤 타이틀을 달았는지로 사람을 평가하는 사회 말고, 그냥 존재만으로 존중받는 사회.
능력과 재산을 떠나서, 조용히 자기 하루를 묵묵히 살아낸 사람도 똑같이 존중받는 곳. 잘난 이야기를 크게 말하는 사람보다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곳. 곧,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그래, 그냥 너면 됐어”라고 말해주는 관계들. 어쩌면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미 그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영달을 추구하기보다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
조건이 아니라 존재로, 성과가 아니라 태도로, 비교가 아니라 존중으로. 그냥 나로 충분한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