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Caracalla에서
여행 중에 하루 저녁 짬을 내어서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는 여유는 삶의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가족과 함께 런던이나 뉴욕을 여행한다면 전 세계에서 모인 여러 인종들 틈바구니에서 피카델리 서커스나 타임스 스퀘어의 휘황찬란한 광고판들만 구경하기보다는 라이언킹이나 시카고 같은 뮤지컬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천 년 가까이 된 유적지의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야외극장이라면 감동은 두 배일 겁니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일단 규모에 압도당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가 Colosseum이고, 둘째가 Catacombe이며, 셋째가 Baths of Caracalla(까라깔라 대욕장)입니다. 설명드릴 필요도 없는 콜로세움은 정말 이토록 큰 건축물을 이천 년 전에 지은 로마는 대단한 문명을 이룬 나라였음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박해의 유산인 까따꼼베는 1989년에 딱 한 번 가보았는데, 인솔자 없이는 다시 돌아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아직도 귓가에 선합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은 시각적 감동이 큰 반면에 역사와 문화, 종교적 배경을 자세히 모르고는 특별한 감흥을 얻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콜로세움에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벤허에 나오는 전차들이 달리는 소리나 관중의 환호성을 들었다는 사람은 못 보았습니다. 까따꼼베에서도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 숨어 지내던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들리지는 않습니다. 물론, 까라깔라 대욕장에서도 이제는 사람들이 목욕하며 떠들고 웃고 즐기는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커다란 목욕탕에서 날만 잘 맞추면 낭만적인 오페라나 유명가수들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까라깔라는 로마의 기세가 저물어 가던 3세기 초반, 향락을 즐기던 까라깔라 황제의 명에 의하여 지어진 공중목욕탕으로 당시 로마에서 두 번째로 크고 가장 화려했다고 합니다. 사방이 400m가량이니 축구장이 여덟 개쯤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욕탕 외에 수영장이 따로 있었다는데, 53m x 23m의 크기였다니 지금의 올림픽 규격보다 큽니다. 그러나 1960년 로마 올림픽 때에는 수영 경기가 아니라 체조 경기가 이곳에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 목욕탕의 잔재 위에서 유명한 공연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껏 가장 유명했던 공연은 파바로티와 도밍고와 까레라스의 Three Tenors였으리라 믿어집니다. 저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대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푸치니는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를 보고 나서 오페라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가장 많은 오페라를 쓴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 푸치니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았던지 일본의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하는 ‘나비부인’과 중국의 북경을 배경으로 하는 ‘투란도트’가 그의 걸작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도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제목과 내용을 잘 조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들어보면 ‘아, 저 노래!’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 절세의 아리아들이 있습니다. ‘투란도트’에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파바로티가 그 커다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성으로 “네~쑤운 도~르마” 하고 시작하는 비디오 클립을 어디선가는 한 번씩들 보셨을 것입니다. 내로라하는 소프라노들이 한 번쯤은 다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도 푸치니의 곡입니다만, 이 곡이 연주되는 단막극 오페라,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지요.
음악을 좀 좋아한다는 제가 마침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에 이 역사적인 공연장, 까라깔라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가 공연된다고 하니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남들은 베로나 오페라 축제도 가는데’라고 생각하니 이 절호의 기회를 흘려보낼 수 없어서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고 공연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지요. 2006년 8월 초 한여름이었는데, 하루 종일 무덥던 날씨가 저녁이 되면서 선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에어컨도 없는 야외공연장이니 기온이 적당하면 더할 나위 없겠구나’라고 기대했는데, 웬걸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기온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턱이 떨릴 만한 여름밤의 강추위가 공연장을 휘감았습니다. 1막 중에는 하늘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도 보고 반짝이는 별도 찾아가면서 오페라를 보았는데, 2막이 올랐을 때에는 당시 만 다섯 살이던 아들이 너무 추워해서 제 반팔 셔츠를 벗어서 덮어 씌우고 아내의 양산을 펴서 바람막이 삼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3막이 시작될 무렵에 아내와 딸아이를 남겨 둔 채, 저는 도저히 추위를 참지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숙소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3막이 시작하면 바로 나오는 아리아가 바로 그 “네~쑨 도~르마”인데 말입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아직도 팔다리가 차갑기만 한 다섯 살 아들을 무릎에 올려 품에 안고서 눈을 감으며, 저 뒤에서 들려오는 듯한 아리아를 상상했습니다. ‘공주가 잠 못 이루는 것이 아니고, 저 노래를 못 들은 내가 오늘 잠을 못 자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참,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고 알려진 Nessun Dorma의 원뜻은 "아무도 잠들지 마라"입니다.
로마에 여행 다녀오신 분들 가운데 꽤 많은 분들이 까라깔라를 못 보고 오셨더군요. 로마 관광에서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콜로세움에서 불과 1km 거리에 있습니다. 공연이 있는 날, 해지는 노을이 이천 년 묵은 대리석 기둥에 비칠 때면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됩니다. 참, 유럽여행 때는 혹시 모르니 여름에도 스웨터 하나씩은 꼭 챙기세요.
2013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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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6901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