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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05. 2016

홍콩 트라피스트 수도원 가는 길

Discovery Bay, Hong Kong 홍콩

홍콩섬의 Central Pier에서 배를 타고 떠날 때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Discovery Bay에 도착해서 수도원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놓을 쯤엔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이미 시작한 발길을 멈추기 보다는 앞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배낭을 메고,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들고, 그리고 오랜만에 DSLR 카메라를 손에 잡았습니다. 자동초점이 아닌 수동으로 사진을 찍기로 마음먹고 말입니다. 날씨 탓에 마음껏 찍을 수 없지만 우산 밑에서라도 그저 느낌 좋은 그림 몇 장을 건질 수 있으면 행복하겠다는 마음으로 나섰던 길이기에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페리에서 내려 수도원 올라가는 길로 들어서는 해변가의 등대)  ©오주현

그동안 여러 번 가보고 싶었음에도 한 번도 기회가 없었던 트라피스트 수도원(Trappist Haven Monastery, 熙篤會神樂院 또는 聖母神樂院)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텅 빈 DB Plaza 정류장을 뒤로 하고, 자주 가는 골프장으로 향하는 오른쪽 대신 왼쪽으로 돌아 해변을 만난 후, 좁은 골목길을 지났습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탄하고 큰 걱정 없는 학창 시절 같았습니다. 처음 보는 풍경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수동으로 찍느라 한참 숨을 참아야 했지만, 그래서 한 컷 찍고 돌아서서 언덕을 오를 때마다 숨이 차기도 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땀도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수도원 아래에 이르러 십자가의 길을 맞이할 무렵엔 꽤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지만 그것도 예수님의 골고타 언덕 같지는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수도원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본, 소나기 내리는 구룡반도)  ©오주현

수도원 성당에 도착했을 때에는 참으로 평온한 마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의 오전 기도 시간에 살짝 들어가 함께 하면서 마치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 같은 느낌으로 뿌듯했습니다. 수녀님들만 계시는 수도원은 TV나 영화에서 가끔이라도 보게 되지만, 수사님들만 계시는 수도원은 이전에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마천루가 즐비한 세계적인 금융의 도시 홍콩섬에서 불과 30분 거리에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시는 수사님들을 만나는 일은 잠시나마 치열한 일상을 뒤로 하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됩니다. 살아온 날들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워 보이는 수사님들의 굽은 어깨와 등을 바라보는 저의 연민 가득한 눈길을 안 보고도 아신다는 듯이, 수사님들의 기도 소리는 청명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월을 이겨내며 살아온 곧은 영성의 소리들이 꾸밈하나 없는 소박한 성당 내부를 가득 채울 때엔, 제 마음도 함께 평화로와 질뿐입니다.

 ©오주현

깨끗이 정화된 듯한 마음으로 수도원을 나서며, 돌아갈 때에는 걸어온 길을 다시 가기보다는 Mui Wo 쪽으로 가기로 정했습니다. 아뿔싸, 그런데 수도원을 나서자마자 Mui Wo로 가는 길은 내려가기보다는 도리어 계속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그것도 한참을 많이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결국 대서산의 석가모니 청동불과 마주 할만한 높이의 대동산 정상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시련이었지만, 꼭대기에 다다르고 보니 참으로 속이 시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주현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질 찰나에, 발아래 1,130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설마 내려가는 계단 숫자일까 했는데,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오랜만에 일천 계단 밟고 내려가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습도 93%의 안개 속에서! 그래도 꾸역꾸역 내려가 보니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구간은 절벽 위에서 바다로 뛰어 들어가듯 가파르고 작은 계단을 밟느라 무척 조심해야 했지만요.


이제 다 왔다 싶었을 때 쯤해서 '왜 우산을 쓰고 내려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산 위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도 좋았지만, 나뭇잎 위에, 바위 위에, 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다시 생각났습니다. 오는 길 내내 사진에 담을 수 없었던 것들이...... 작은 바위들과 모래사장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 빗방울이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에서 지저귀던 새소리, 수도원 수사님들의 광동어 찬트 소리, 길 위의 젖은 나뭇잎을 밟고 미끄러지는 내 발자국 소리, 바람과 함께 피어오르는 안개 소리, 계곡을 세차게 또는 유연하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 멀리 구룡의 건물들 위로 세차게 내리 퍼붓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던 그래서 들릴 것 같던 여름 소나기 소리, 빗속에서도 골프를 즐기던 Discovery Bay Golf Club의 Diamond 7번 홀 그린 위의 사람들 소리, 멀리 보이던 디즈니랜드에서 퍼져 나와야만 할 것 같은 아이들의 함박웃음 소리......

인생은 아쉬운 것들을 뒤로 하면서 계속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겠죠?


(실버마인 해변에서 바라본 안개 낀 대동산)  ©오주현

내려와서 돌아본 산은 여름 안개 속에 아름답기만 했습니다. 평지에 내려와서 몸이 조금 자유로와지고 났을 때, 비가 더 많이 내렸습니다. 할 수 없이 커다란 DSLR을 가방에 넣고 iPhone을 꺼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날씨 상관없이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들이대기엔 역시 iPhone이 훨씬 낫다는 것을.


Silvermine Beach를 길게 돌아 Mui Wo Ferry Terminal 앞에 도착했을 때, 지금껏 제 인생에서 보았던 자전거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자전거들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는 날이 개면 저 자전거들을 타고 새로운 세상 구경을 나가겠지요?

(Mui Wo 선착장 앞의 자전거들)  ©오주현


2013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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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69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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