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보내는 박수 #3
현대인들에게 현대음악은 듣기 쉬운 음악이 아닙니다. 음악 자체도 어렵거니와 공연도 많지 않습니다. 똑같은 바이올린과 첼로로 연주하는데도, 귀에 익은 바흐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고전음악과는 달리, 왠지 박자도 제멋대로이고 화성도 불협화음이 더 많은 듯합니다. 자주 듣는 고전음악들은 편안하게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끼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로 신경을 거슬리기도 하는, 잘 이해도 하지 못하는 현대음악을 콘서트장의 의자에 앉아서 여러 곡을 듣는 일은 때로는 고역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음악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음악이 무엇입니까? 먹고살기 바빴던 인간이 처음으로 오락거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을 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따라 노래하지 않았을까요? 나뭇가지로 돌과 나무 등걸을 두드리며 신나게 춤을 추지 않았을까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음악”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
가장 널리 이용되는 영어사전인 Merriam-Webster는 music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1a: the science orart of ordering tones or sounds in succession, in combination, and in temporalrelationships to produce a composition having unity and continuity
1b: vocal, instrumental, or mechanical sounds having rhythm, melody, or harmony"
Merriam-Webster의 정의 1a는 표준국어대사전보다 더 넓은 의미로 음악을 정의하고 있으며,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음악”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선 무엇보다도 음악은 “자연스럽게 느끼고자 할 때 들려오는 소리”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내게 방해가 되는 상황이라면 음악이 아니라 소음일 뿐입니다. 아빠가 듣고 있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도 내일 당장 시험을 앞두고 있는 고3 수험생 딸에게는 시끄러운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그리 달갑지 않은 초대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안면과 체면을 위해서 앉아 있는 클래식 공연장에서 듣는 소리들 또한 음악이 아닐 것입니다. 반면에,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는 대개의 사람들, 특히 부모와 가까운 친지들에게는 더없이 반갑고 즐거운 음악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울음소리가 시간이 지나면서 밤잠을 설쳐야 하는 엄마에게는 더 이상 음악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 아기가 “까르르" 한 번 웃어준다면 엄마에게는 그보다 더 훌륭한 음악이 또 없습니다.
그러니,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떤 소리라도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전음악의 제목과 작곡가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예술의 전당 같은 공연장에서 고상한 모습으로 관람해야만 “음악을 조금 아는 척”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종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혹은 난해한 현대음악을 듣는 척이라도 하면서 음악적인 조예가 깊은 것으로 보이기를 원하지는 않나요?
며칠 전 친구가 마련한 현대음악 공연에 참여했습니다. 제가 연주를 한 것은 아닙니다만 공연에 “참여”한 것은 맞습니다. 벚꽃이 떨어진 자리에 싱그러운 초록의 잎들이 돋아나는 경복궁 옆을 지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편 안국동 골목 안에 얌전하게 들어앉은 작은 갤러리에서 공연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ㅁ자로 이어진 회랑으로 이루어진 갤러리 건물은 에폭시 바닥과 창틀에 끼운 유리를 제외하면 한옥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살짝 경사진 집터에 올라앉았기에, 계단을 통해 작은 입구로 올라서면 오른쪽 왼쪽으로 전시공간이 되는 회랑이 보이고 앞으로는 아트리움으로 꾸며진 뜰이 보입니다. 뜰의 가운데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북쪽 회랑만 벽이 섰고, 나머지 세 방향은 통유리와 쪽 유리창을 통해서 안팎이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도 시원하게 보입니다. 네모 반듯한 뜰은 잔디 대신에 가는 백사토를 깔아 두었는데 그 위로 공연을 위해서 두 장의 커다란 멍석을 펼쳐 놓았습니다. 요즘 보기 어려운, 촘촘하게 잘 짜인 멍석입니다. 금방이라도 남사당패들이 한마당 놀아볼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퇴근 무렵부터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때문에 뜰에서 연주하기로 했던 계획을 변경해서 남쪽과 동쪽의 회랑 안으로 연주자들의 위치를 변경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주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죠.
아직 손님들이 서로 인사하는 가운데, 앙상블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친구가 공연의 시작을 알립니다. 관객들을 위해 나란히 놓인 의자가 없어서 예상했던 것처럼 아무 곳에나 편할 대로 앉거나 서서 공연을 감상하면 되고, 심지어 돌아다녀도 된다고 합니다. 특히, 이번 공연은 친구와 같은 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최인수 교수의 조각/판화 전시회와 collaboration의 성격을 띤 것이기에 관객들은 공연 중에 미술작품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몇몇의 관객들은 동편 회랑의 열린 창문턱에 걸터앉았습니다. 맞은편 통유리창 앞에도 여러 분들이 처마 밑으로 자리 잡고 바닥에 앉으셨고, 어떤 분들은 조각 작품들 사이 벽에 기대었습니다.
축축한 공기에 충분히 젖은 한옥의 처마 끝 기와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 똑 떨어질 때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막 일몰의 시각을 지난 하늘은 비를 머금은 낮은 구름따라 잿빛으로 변해갑니다.
첫 곡은 Sean Hickey(https://www.seanhickey.com)라는 미국인 작곡가의 “Left at the Fork in the Road”(2003)로 한국 초연입니다. 성서의 에제키엘서 21장에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준비시킨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한 바빌론의 임금에게 이스라엘을 넘겨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왼쪽 길이었으면 이스라엘은 바빌론 임금의 칼을 맞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살면서 여러 번 갈림길을 만납니다. 그때마다 확신을 갖지 못한 선택에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아노가 없는 플루트, 클라리넷, 바순의 목관 3중주는 그 갈림길에선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빠르고 무질서한 듯한 박자로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아래 링크는 작곡자 Sean Hickey의 웹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Left at the Fork in the Road”입니다.
https://www.seanhickey.com/composition/left-at-the-fork-in-the-road
두 번째 곡은 신지수(http://blog.jisushin.com)의 "The 11th Dimension"입니다. 한옥 공연 시리즈 노카(Nohka)를 통해서 전국 각지의 한옥에서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준비 중이라는 이 젊은 작곡가는 놀랍게도 스티븐 호킹의 천체물리학 서적을 읽다가 입자와 반입자의 관계에 대한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프로그램 노트를 인용하는 것이 이 곡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일 듯합니다.
"음악적으로는 조금 더 단순화시키서 기타와 거문고가 서로의 제스처를 시간차를 두고 모방하며 서로 주선율과 반주 역할을 교대로 나눠 갖는 형식을 띄게끔 하는 동시에 책을 읽을 당시의 상상에서 나오는 무한한 우주의 텅 비고도 복잡다단한 세계를 떠올린 때의 신비로운 감성을 표현하였다."
예술가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차원의 뇌에서 출발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입니다. 다만, 한옥의 처마 끝에서 구두 코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기타와 거문고의 운율과 맞아떨어지는 듯할 때마다, 제 들숨과 날숨도 하나가 됩니다.
바로 그 무렵,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 저편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 전통의 소리들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여보니 아마도 멀지 않은 조계사에서 들여오는 소리인 듯합니다. 나지막한 음악 위로 불경을 외는 듯합니다. 알아듣지 못하니 그저 소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옥을 기와를 타고 넘어 처마 끝에서 뜰로 내려앉은 그 소리들은 기타와 거문고의 소리와 기가 막히게 어울려 "음악"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제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이 되었습니다. 음악을, 현대음악을 다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거문고 가락을 타고 올라옵니다.
아래 링크는 작곡자 신지수의 웹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The 11th Dimension”입니다.
https://youtu.be/pMdo1UTvWR4?list=UUAWInk-3YjxB5Pd2eMPfERw
세 번째는 일본인 작곡가 Masakazu Natsuda의 "Les Chants Préhistoriques"입니다. 역시 한국 초연인 이 곡은 정규앨범으로 발표된 때문인지 인터넷 상에서 연주 동영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제 느낌엔 이 작곡가가 제 친구가 추구하는 음악적 가치와 매우 잘 어울리는 작곡 의도를 가졌다고 보입니다. 그는 "20세기 말에 형성된 수많은 사고와 방법론들(미분음을 사용한 음계, 매개변수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 등)을 이용하여 작곡하면서도 현대음악의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형태와 담론들을 제거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연주자가 갤러리의 전시공간 속으로 들어가서 연주하는 모습이 모든 관객의 시선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곡을 구성하는 오직 3개의 단순한 재료들 - 유연한 장단적 리듬 패턴들, 급격히 하강하는 삽화적 프레이즈, 발로 치는 박 - 만으로 이루어진 이 바이올린 곡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처럼 "원시적이고 선사적인 관점으로부터 도출한 '새로운 노래' 또는 '멜로디'에 대한 가능성"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앞에서 살펴본 음악의 정의를 새삼 새겨보는 기회를 마련해 줍니다. 마룻바닥을 구르는 구둣발 소리가 바이올린 곡의 일부가 되어 음악이 된다고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Theodore Wiprud(http://www.theodorewiprud.com)의 곡, "Mudang"이 연주될 즈음엔 서녘 하늘 끝자락에서 잿빛 구름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습니다. 이 곡 역시 한국 초연인데, 피리 연주자인 가민과의 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곡이랍니다. 서양악기로 이루어진 현악 4중주를 이끌어 가는 전통의 피리 소리는 눈앞에서 무당의 굿이라도 보는 듯이, 가뜩이나 나무 문틀 위에 앉아 아프던 엉덩이를 씰룩거리도록 만듭니다.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이 서양 작곡가는 우리의 피리 소리와 장단을 이렇게 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조계사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멈추었지만, 갤러리 밖 골목길에 오토바이가 지나는 소리가 들립니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습니다. 마침 제 친구도 갤러리 입구 근처에 서 있다가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감독하는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에 긴장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늘도 마치 구경꾼 인양 이리저리 서성이며 관객들과 눈웃음으로 인사하고 있습니다. 무심한 듯, 태평한 듯, 관조적인 자세가 그의 음악세계를 말해줍니다. 음악은 우리가 느끼고 즐겨야 하는 소리의 향연일 뿐, 출세와 입신양명의 수단이 아니며, 돈벌이의 수단은 더욱더 아니며, 긴장하고 불편하게 감상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골목길에는 빗방울이 아직 떨어집니다. 조금 떨어진 떡볶이 가게에서 나온 듯한 젊은 남녀 셋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쓴 채 커다란 소리로 웃고 떠들며 갤러리 옆을 지나갑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습니다. 그 독립된 감정들로부터 생성된 소리조차도 뜰 안에서 들려오는 피리와 장단이 맞습니다. 지나는 행인의 빗길 속 발자국 소리도 가로등 불빛에 부딪혀 뜰 안으로 튕겨 들어가 자연스레 합주가 됩니다. 이 모든 소리가 우리가 안주하고 있던 공간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함께 음악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안과 밖의 구분이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이미 모호해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연주는 계속되고 저와 친구는 입구의 계단에 서서 그 음악을 듣고 나누고 또 곱씹어 삼키고 있었습니다. 밤하늘 아래 모든 소리들이 친구가 마련한 음악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래 링크는 작곡자 Theodore Wiprud의 웹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Mudang”입니다.
https://soundcloud.com/theodore-wiprud/mudang-excerpt-jungmori-jungjungmori
현대음악을 주로 하는 친구는 그가 기획하는 공연 속에 거문고 산조를 자주 초대합니다. 이번에도 윤은자 선생이 "신쾌동류(申快童流) 거문고 산조"를 연주합니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전통음악의 신동 소리를 들었던 신쾌동(본명 신복동) 선생이 평생을 끌어안고 살았다는 거문고 산조는 앞서 연주된 네 곡의 현대음악에 전혀 뒤지지 않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잘 모르고 들으면 우리 국악도 현대음악 못지않게 어렵죠. 거문고가 산조를 흩뿌려내는 동안에도 의도치 않은 "소리들"이 거문고에 합류합니다. 어린 두 소녀가 뜰의 백사토를 밟으며 화장실 가는 소리, 아까 지나간 배달 오토바이가 다시 돌아오는 소리, 옆에 앉은 분이 구두 끝으로 바닥에 장단을 치는 소리, 손에 들고 있는 프로그램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은 완벽한 돌비 스테레오를 자랑하며 갤러리의 사방 천장 서까래 아래에 모였다가 다시 바람처럼 회랑을 돌아나갑니다. 우연히 인사하게 된 한 스위스인 관람객에게 물었습니다.
"스위스의 생갈렌에 있는 도서관과 여기가 비교가 돼?"
"여기가 더 좋아! 저 하늘을 봐!"
그도 음악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초연이라는 마지막 곡이 연주될 무렵에도 저는 아직 친구와 함께 밖에 서 있었습니다. 친구가 간단히 설명을 해줍니다.
"이 곡은 즉흥적으로 매번 다르게 연주할 수 있게 작곡되었어. 악보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쉽게 구분하도록 색깔이 칠해져 있는데, 리드하는 연주자가 정하는 색깔을 따라 연주하는 거야."
"그럼 연주 때마다 미리 그 연주 순서를 정해? 아니면 완전히 즉흥적인 거야?"
"정하기 나름인데, 대략 반 정도는 미리 정하지만, 나머지 반은 연주 중에 즉흥적으로..."
얼른 뜰 안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정말 연주 중간에 "레드", "블루"라는 구령 소리가 납니다.
프랑스 작곡가인 Philippe Festou(http://philippe-festou.webnode.fr)의 작품, "Intervalle for String Quartet No.2"는 네 명의 연주자들이 서로 떨어져서 마주 보며 연주하게 함으로써 관객들이 서로 다른 시각적, 청각적 관점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인 곡인데, 비가 오는 관계로 아쉽게도 그 맛을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아래와 같이 작곡가의 홈페이지에 리허설 당시의 사진이 올려져 있어서 그 느낌을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예술을 이해하려 들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과서에 실린 시에 대해서 맞는 설명을 고르라고 하면, 시를 쓴 시인도 맞추지 못하는 정답을 획일적으로 답하기를 강요받은, 한국의 불행한 객관식 교육의 희생양이자 결과물들인 우리의 감정은 꼭 예술을 이해하야만 한다는 전투적인 자세로 음악회에 나섭니다.
친구는 공연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지 말고 그냥 들으라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아래 사진에서 하얀 조각 저 뒤로 연주되는 음악이 "보이고" 또 "들리십니까?"
p.s. 친구는 TIMF앙상블(http://timf.org/foundation/timf_introduce.do)의 예술감독입니다. 많이 응원해 주세요.
위 공연의 리허설 사진들과 TIMF앙상블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페이스북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EnsembleTim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