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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02. 2016

그리운 선생님

600 단어 글짓기

딸아이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을 보니 자기소개를 하는 에세이를 써야 한답니다. 자신의 인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배운 교훈 등과 같은 소재를 선택해서 600 단어 이내의 짧은 글로 자신을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본인의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솔직하게 적어야 할 것이기에 부모로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죠. '나라면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었을까?'


얼마 전에 방영된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프랑스의 대학입학시험에는 철학을 논하는 문제가 출제됩니다. 철학은 비단 대학입시에서만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부터 정규수업시간에 철학을 주제로 토의하고 대화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었죠. 최근에 페이스북에서 보았던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시험문제들이 매우 높은 수준의 인문학적 이해와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던 것이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1987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대학입시에서 처음으로 논술고사를 치렀던 세대죠. 학교에서 약간의 논술준비를 시켰지만 선시험 후지원 제도의 마지막 학년으로 학력고사 점수가 당락을 좌우하고 논술의 영향은 미미할 것이었기에, 대개는 각 대학별로 제시된 예상문제들을 가지고 글짓기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 학생이 아니라면 제대로 된 문학책 한 권 읽는 학생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으니, 논술은 커녕 작문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학생들이 대다수였죠.


고등학교 1, 2, 3학년 담임선생님이 각각 수학, 국어, 영어선생님들이셨습니다. 소위 주요 세 과목 선생님들을 담임으로 모셨으니 행운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한번도 예외없이 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은 과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국영수가 아니라 “국민윤리”였습니다. 국민윤리는 학력고사내 비중이 매우 적고, 과거 몇 십년 동안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문제가 출제되는 과목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신경써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국민윤리 수업시간은 체육이나 음악, 미술과 마찬가지로 국영수 시간으로 대체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국민윤리 시간이 언제나 기다려지는 즐거운 수업이었습니다.


국민윤리를 가르치시던 이달수 선생님께서는 정년퇴임을 몇 년 앞둔 분이셨습니다. 마른 체격에 곱슬머리, 긴 얼굴형에 짙고 긴 눈썹, 크고 길게 날이 선 코, 두툼한 입술, 커다란 목젖과 신체적 특징이 제 외삼촌들과 많이 닮으셨죠. 한쪽 다리가 불편하셔서 지팡이를 짚으셨지만 걸음을 부축해 드릴 때 내 팔을 잡으시는 손아귀의 힘은 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수업만큼은 그 정정하신 힘만큼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창 자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더구나 국민윤리 수업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학생들에게 예순이 넘으신, 그러니까 대개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조부모님들 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분께서 바로 그 “질풍노도”를 설명하시는 모습은 안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열심히 듣고 심지어 질문까지 하는 저를 귀여워하셨던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에 어머니께서 꽤 큰 수술을 받으시느라 한 달 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아버지와 저희 두 형제는 우리끼리 맛있는 것 해먹으며 잘 지낼 거라고 큰소리쳤지만 이내 얼마 안 가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바로 그 시기에 저는 소위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골똘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과연 긍정적인 인간인가’, ‘나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부모님에 의해 외향적인 성격으로 키워졌는가’ 하는 주제들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0시의 플랫폼’이라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색색깔의 초를 책상 위에 켜두고는 “고등학생을 위한 철학”과 같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칸트와 니체라는 철학자들의 이름을 접하며 조금씩 아는 체하고 싶어졌고, 그러한 욕구의 분출을 이달수 선생님께서 매우 기쁘고 자연스럽게 받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제게 바르고 성실한, 착하고 정직한 삶에의 지향을 종교처럼 심어주셨습니다. 당시 저는 신앙에서 잠시 멀어져 냉담하고 있었기에, 소나기 내리는 여름철 날씨처럼 변덕스럽던 제 마음에 선생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분이셨습니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후인1989년에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아마 그 해에 정년퇴임을 하셨겠죠. 그러고도 25년이 더 지났으니, 지금 살아 계시면 연세가 아흔을 헤아리고도 남으실 겁니다. 찾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유명을 달리 하셨다 하더라도 선생님께서는 제 마음에 살아계십니다. 어디가더라도 반듯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고, 칠판에 글자 한 자도 분필이 부러질 듯이 세게 눌러 반듯하게 쓰시던 그분의 가르침이 오늘을 살고 있는 제게 더없이 큰 영향을 주셨음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고등학생의 눈에 그저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노인의 모습으로만 보여질 수 있었던 선생님의 모습을 제가 오늘 비슷하게 닮아가고 있다면 저는 오히려 행복할 듯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과학기술문명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은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저는 하루하루를 선생님의 걸음처럼 천천히, 선생님의 자세처럼 반듯하게, 선생님의 눈빛처럼 맑게, 선생님의 음성처럼 단호하게, 선생님의 정신처럼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것이 저를 더욱 저답게 완성해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596 단어

2013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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