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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Apr 30. 2016

완전한 휴가 - 프로방스에서

Montée d'Eyragues, France

직장인들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완전하고 완벽한 휴가입니다. 여행책자를 들고 "must to see"와 "must to eat"를 찾아다니며 인증샷을 찍는 여행은 당연히 즐겁고 재미있죠.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안 하는 자유를 누리며 가끔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천천히 일어나서 길을 나설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건 진정한 휴식이 되는 평온한 휴가일 겁니다. 언제나 가족들을 이끌고 휴가를 계획하고 다녀와야 하는 아빠에게 온전한 휴식이란 기대할 수 없는 사치입니까? 격무에 시달린 아빠가 가족에게도 기쁨을 안겨주는 동시에 아무 생각 없이 한 나절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홍콩에서 근무하던 2004년에 뉴질랜드로 휴가를 떠나면서 직장동료들과 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뉴질랜드도 GSM을 쓰는 나라이니까 Blackberry서비스가 있을 거야. 급하면 연락해.” 당시 블랙베리가 일선 업무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지 일 년여 되었을 때라, 그거 하나 지니고 다니는 것이 폼나는 일 중의 하나였죠. 물론, 그때는 인간이 그런 종류의 기계들의 노예가 될 줄은 몰랐었죠. 그런데 웬걸 도착하자마자 뉴질랜드에는 아직 블랙베리 서비스가 도입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순간 걱정과 기쁨이 제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교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어쩌나… 아니야, 잘 됐어! 급하면 어떻게든 연락을 하겠지.’ 처음 하루 이틀은 불안했지만 날이 지날수록 더욱 즐거웠던  그 휴가는 결국 저로 하여금 그 이후에 가족 휴가를 더욱 열심히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구 상에서 전화와 인터넷 서비스가 미치지 않는 오지를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2011년 여름에 스위스와 프로방스를 여행할 때의 일입니다. 스위스에서 사용하던 렌터카를 반납하고 제네바에서 기차를 타고 아비뇽으로 와서 다시 차를 빌려 미리 예약한 작은 호텔을 찾아갔습니다. 기차역에서 불과 30분 떨어진 곳이라고 했는데, 십여 분만에 시골길로 들어선 내비게이터는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비게이터의 창을 아무리 확대해서 들여다 보아도 목적지가 표시된 주변에는 연결된 도로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가까운 곳에는 마을도 보이지 않고 지나는 사람도 자동차도 없습니다. 가족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하다가 결국엔 괜히 너무 한적한 곳에 숙소를 정한 것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지나는 농장 트럭을 하나 만났습니다. 불어는 한마디도 못하기에 아예 숙소의 이름이 적힌 예약 노트를 들이밀었습니다. 친절하게도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잠시 후 우리가 몇 번이고 그냥 지나쳤던 아주 작은 시골길로 들어갔습니다. 그 볼품없는 시골길의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마치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멋들어진 길이 나타났습니다. 자잘한 석회석 자갈들이 깔린 길 양옆으로 큰 키를 자랑하며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들은 하얀 석회석 먼지를 뒤집어쓰고는 멋진 파스텔톤의 색깔로 우리는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들 사이로 석회석 자갈들 위로 사각사가 소리를 내며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속으로 자동차는 계속 들어갔습니다.

차 안에서 가족들이 멋진 진입로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동안 목적지에 다다랐고, 차에서 내리는 순간 모두 무엇엔가 홀린 표정으로 이구동성입니다. “와! 아빠, 우리 계획한 것 다 취소하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있어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처음 보지만 생소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지극히 아름답고, 그 자체로 그저 평화로울 뿐입니다. 이리저리 몸을 굴려 누워있는 듯한 나지막한 구릉들이 지평선까지 널려 있습니다. 언덕들 위로 프로방스 특유의 색과 내음을 지닌 갖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무리 지어 서있습니다. 몇 발 자국 앞에서 노랗고 까만 꽁지를 지닌 꿀벌들이 떼를 지어 붕붕 거립니다. 허리 아래로는 천지가 라벤더로 뒤덮였기 때문입니다. 그 보라색 향기가 감싸 안은 작은 호텔은 15세기에 지어진 농장 건물을 개조한 것이랍니다.

마치 새로 이사 온 새 동네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폴짝 거리는 아이들처럼 쿵쿵거리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호텔 방 안으로 들어오면 한 번 더 감동입니다. 파스텔 톤이 아니면 색도 아니란 듯이 꾸며 놓은 방안엔 소박한 가구들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반깁니다. 빳빳하게 풀 먹인 침대 시트는 어찌나 감촉이 좋은지 바스락 거리기까지 합니다.

이곳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여러 곳을 다녀 보았지만, 그렇게 문명과 떨어져 있다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불편한 것도 없습니다. 캐나다와 뉴질랜드의 외딴곳들도 가보았고, TV도 전화도 없는 리조트들도 가보았지만, 이곳만큼 편안한 곳은 없었습니다. 우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이 소박합니다.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그저 만만하기만 합니다. 알프스나 캐나다 록키처럼 거대한 자연에 눌리지 않고 우리가 자연과 하나 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한여름 성수기였는데도 호텔에 숙박하는 가족이 몇 되지 않아서 하루 종일 마주치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하염없이 순박한 얼굴의 종업원들은 며칠 전에 만나 함께 여행하고 있는 친구 같습니다. 커다란 마당의 수영장에는 우리 아이들을 빼면 개구리 한 마리가 더 놀고 있습니다. 수영장 뒷마당 한 켠에는 닭장도 있고 채소밭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녁에 닭요리를 주문하면 저 가운데 한 마리가 식탁 위로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아침에 먹은 오믈렛은 틀림없이 저기서 꺼내온 달걀과 그 옆에서 따온 토마토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참, 이 시골 구석의 작은 호텔에 딱 하나 있는 식당도 "미쉐린 스타" 식당입니다. 분위기가 근사한데 뭔들 맛이 없겠습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일 뿐입니다.

과일 한 접시, 핑크빛 로제 와인 한 잔, 그리고 책 한 권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수영장 곁에 누워 낮잠을 즐기는 것도 재미없어질 때면 자전거를 타고 주변을 누빕니다. 끝도 없는 라벤더 농장에서 향기에 취해 페달을 밟다 보면 금방이라도 울타리를 뛰어넘을 것 같은 말들이 노니는 목장을 지납니다. 바로 옆의 사과밭에서 떨어진 푸른 사과들을 울타리 사이로 들이밀면 망아지들의 커다란 눈망울과 눈을 맞춰 볼 수 있습니다. 목장 옆 사과밭에서는 망아지들을 위한 사과를 주웠지만, 그 옆의 복숭아밭에서는 우리 입으로 들어갈 놈들을 몇 개 서리해 옵니다.

서녘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갈대 끝에서 부서지며 소리를 낼 즈음에는 차를 몰아 주변의 포도농원에 딸린 멋진 식당에서 근사한 만찬을 즐길 수 있습니다. 줄지은 포도나무가 잔디처럼 보이는 언덕 위에 위치한 샤또의 앞마당에 펼쳐 놓은 식탁 바로 옆에는 천년이 넘은 올리브 나무들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 같은 모양새로 서 있습니다. (이 곳의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들려드리죠.)


떠나는 날엔 ‘코트다쥐르에 내려가면 더 멋진 곳이 우리를 반길 거야’라고 위로해 보지만 발길이 잘 떨어지질 않습니다. 무언가를 계속해야만 본전을 뽑을 것 같은 리조트에서의 휴가, 관광버스를 매 시간마다 타고 내려야 하는 단체여행, 한 가지 놀이기구라도 더 타기 위해 아이들보다 먼저 가서 줄 서야 하는 놀이동산들, ……

가끔은 이런 행복한 구속으로부터 조차도 자유롭고 싶을 때에는 완전한 휴가를 가고 싶습니다. 밤마다 수많은 별들이 은하수를 타고 낮게 반딧불처럼 내려와 내 마음속에서 평온히 머무르다 가는 곳으로 말입니다.


아래 링크는 같은 매거진의 이전 글입니다.

https://brunch.co.kr/@690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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