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3장 15절
가끔 정동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직장인 미사에 참석합니다. 12시 10분에 시작하는 미사는 대략 30분이면 마치기에 점심시간에 다녀오기에 안성맞춤이죠. 미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입구의 테이블에 놓인 말씀사탕(성경 구절들을 적어서 동그랗게 말아 놓은 것입니다)을 하나 집었습니다. 유리통에 담긴 색색의 말씀사탕들 중에서 노란색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말씀사탕에 적힌 성경구절들은 대개 잘 아는 구절들인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묵시 3, 15)
우선, 저 말씀사탕을 펼쳤을 때,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성경을 통독도 하고 컴퓨터 쓰기로 통서도 해보았기에 웬만한 구절은 눈에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구절은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처음 대하는 구절처럼 느껴졌습니다. 요한 묵시록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평소에 자주 보게 되지 않습니다. 또한, 대략 3년 주기로 구약과 신약의 주요 부분을 거의 다 봉독하게 되는 미사 전례에서도 요한 묵시록은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는커녕 처음 보듯이 생경한 성경구절을 눈앞에 대하고 보니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 몇 분께 여쭈어 봤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명쾌한 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어느 한 분이 좋은 힌트를 주셨습니다. 결국 '스스로 찾아보라'는 뜻이라 생각이 되어서 반나절을 묵상하고 반나절을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많은 해석들을 읽어보았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리 정확하다거나 명쾌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실 가톨릭에서는 성서의 내용을 신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읽고 배워야 합니다. 물론 묵상을 통해서 말씀을 곱씹고 소화해내는 것은 말씀의 해석과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 쓴 글은 가톨릭의 가르침이 아니라 제가 개인적으로 묵상한 것임을 명확하게 밝힙니다.
배경이 되는 지식을 간단히 살펴보면, 요한 묵시록 3장에 등장하는 일곱 번째 편지의 대상이 되는 라오디케이아(Laodicea)교회는 섬유와 제약이, 그리고 금융이 발달한 부유한 도시였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깨끗한 물이 부족해서, 그 유명한 로마의 수로를 이용해서 온천이 유명한 북쪽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로부터 "따뜻한" 물을, 그리고 남쪽의 콜로새(Colossae)로부터 산속 얼음이 녹아 흐르는 "차가운" 물을 공급받아 사용했답니다. 따뜻한 물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이 되고, 차가운 물은 사람들을 상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죠. 그런데, 북쪽의 따뜻한 물과 남쪽의 차가운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케이아에 도달할 무렵이면 "미지근한" 물이 되어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되었답니다.
라디오케이아 교회는 신앙을 따르는 듯하였지만, 실은 부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존재하는 신앙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처럼 제구실을 못하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몸뚱이만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저를 질책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얻고자 소원하는 것이 많은 제게 "네 신앙은 뜨거우냐 혹은 차가우냐?"라며 질책하시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매일 기도한다면서 한 번도 무릎 꿇고 앉아서 그 시간을 온전히 바쳐 기도하지 못하는 저를 돌려세우시려 주신 말씀입니다. 걸어가며, 운전하며, 버스나 지하철 속에서 바깥 풍경을 보거나 광고판을 바라보며 입으로만 기도하는 저에게 "너의 기도는 뜨거우냐, 차가우냐?" 물으십니다.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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