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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May 14. 2016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

"한글 전용 vs 漢字 混用"보다  더 중요한 문제

    어제는 헌법재판소에서 소위 "한글 전용 정책"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공개변론이 있었습니다.  국어기본법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다시 뉴스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양측의 공방이 제각각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말과 우리글이 가지고 있는 역사를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논쟁일 뿐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나 민족도 순수하게 자신들의 말과 글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순(純)우리말"을 쓰자고 할 때조차도 "순(純)"이라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그 단어가 만들어지지도 않고 뜻이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어느 한쪽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조만간 다시 붉어져 나올 문제이며, 영원히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양측의 논쟁에서 어느 한 편을 지지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양측 모두에게 이 해묵은 논쟁을 내려놓고, 우리말과 우리글과 관해서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비판하고 반성한 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대한민국 교육의 엄연한 현실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경제에서 차지하는 학원산업의 비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사교육 시장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웃지 못할 농담도 하루 이틀 들은 것이 아닙니다. 좁은 국토에서 많은 인구가 무한 경쟁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둘도 아니고 하나만 낳은 자녀들을 경쟁력 있는 아이로 기르겠다는 부모의 강력한 의지를 무한대로 자극하는 공포 마케팅의 결과로 '신기한 한글나라'도 생겨났고, '선행학습'도 생겨났고, '외고, 특목고, 자사고'도 생겨났고, 특정 지역의 집값이 매매, 전세할 것 없이 오른 것도 사실입니다.


    논술 준비 학원 설명회에서 잘 나가는 강사가 엄마들의 마음을 휘어잡습니다.

    "여기 오신 어머니들 중에 자녀가 초등학교 3학년 이하인 분들 손들어 보세요. 네, 열성이시군요."

    "그럼 초등학교 4학년부터 6학년, 손들어 보세요. 지금 딱 잘 오셨어요. 저랑 같이 시작하시면 됩니다."

    "이제 중학생을 둔 어머니들 손들어 보세요. 네,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저 혹시 고등학생 어머니들도 계세요? 저기 두 분, 나가세요. 안 됩니다. 늦었어요. 집으로 가세요."

    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문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면, 나머지 엄마들은 이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강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웁니다. 그리고는 집에 가서 불쌍한 아이들을 "쪼을" 계획을 세우겠죠.


    그런데, 저렇게 논술 교육까지 받는 아이들 가운데 우리말과 글을 조리 있게 말하고 문법과 철자에 맞추어 글을 쓸 줄 아는 아이들은 드물기 짝이 없습니다. 영어 단어는 철자를 틀리게 쓰면 창피하게 생각해도, 우리말 단어는 아무렇게나 써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대개의 대화창에서 철자는 커녕 아예 띄어쓰기를 전혀 하지 않는 아이들도 흔히 봅니다. 우리말 발음은 높낮이는 없어도 길고 짧게 발음해야 하는 장단은 분명해야 의미가 전달할 수 있는 경우들이 많지만,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아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거의 100%가 초등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졸업한 청장년의 세대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이제 아무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쟁에서 누구도 쉽게 이길 수 없을뿐더러, 이겨도 별 득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뒤를 돌아봐야 아무 소용없습니다. 앞으로 잘할 수 있는 방법, 누구에게나 득이 되는 방법,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표음문자입니다. 그래서 문자가 없어서 사라져가는 소수민족들의 언어를 문자로 기록하기 위해서 유엔이 한글을 사용할 정도입니다. 표음문자들은, 특히 한글은, 음소를 나타내는 자음과 모음의 음성학적 소리를 이해하고 음절을 이루는 규칙을 이해하면 읽고 쓰기를 배우는 일은 무척이나 쉽습니다.


    문자 교육은 모든 교육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모든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제공되는 공교육의 첫걸음, 초등학교는 그래서 1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의 첫 단원에서 'ㄱㄴㄷㄹ...... 아야어여...... 가나다라......"를 배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하고 쉬운 그리고 중요한 한글 교육을 공교육의 첫 시간에 배우지 않습니다. 7살이나 8살에 시작하는 초등학교 1학년은 곧바로 받아쓰기를 하고 글짓기를 합니다. 서너 살부터 집에서 배웠거나, 유아원이나 유치원을 다니면서 한글은 다 깨쳤어야 학교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한글을 모르면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가서 '여태껏 한글도 안 가르치고 뭐 했냐?'는 핀잔을 들어야 합니다.


    대부분 6-3-4 학제를 채택한 미국의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1학년이 우리나라의 유치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홍콩의 학교들도 대개 총 13년의 학제를 기본으로 초중고 과정이 이루어지고, 역시 첫해는 우리의 유치원 과정에 해당합니다. 물론 학교에 입학하는 만 5세 이전에 nursery나 pre-school이라고 부르는 유아원과 같은 과정을 다니기도 합니다만, 글을 배우거나 외국어를 배우지는 않습니다.


    이제 제가 주장하고 싶은 바를 눈치채셨나요? 유치원 교육과정 1년을 공교육에 포함시키는 것이 어떨까요? 좋은 유치원을 보내겠다고 줄을 서서 입학원서를 내고 추첨을 해야 하는 사태를 피하고, 유치원부터 "떨어졌다"는 패배의식을 가지게 되는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고, 모두가 한글을 "학교"에서 1학년 1학기 첫 국어 시간에 배우기 시작하면 좋지 않을까요? 가계가 비싼 유치원 학비도 절감하고, 정부가 보조하는 비용도 차라리 공교육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도 세 살부터 한글을 가르치고 선행학습을 시켜서 학교에 보내면 어떻게 할 거냐고요? 그냥 무시하고 과정대로 천천히 다시 수업하면 됩니다. 예전처럼 60~80명씩 모아 놓은 교실이 아닙니다. 전국의 초등학교 1학년 학급당 평균 학생수는 겨우 스무 명을 넘습니다. 얼마든지 재밌게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시험을 치르고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교육을 하지 않는 초등학교에서 한글을 자음과 모음부터 가르친다면, 그리고 부모가 제공한 사교육의 정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아이들의 나이에 알맞은 교육을 철저하게 시행한다면 많은 부모들은 사교육에 그 엄청난 돈을 들이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은 부모들은 일단 계속해서 사교육비를 쓰게 하면 됩니다.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초등학교를 일 년 빨리 입학하면 되면 될 것 같지만, 지금과 같이 한글은 집에서 배워오는 교육을 일 년 앞서 시행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몇 년 동안 늘어난 입학생들을 감당하느라 학교 선생님들만 힘들 겁니다. 그냥 지금 있는 모든 유치원들을, 사립이건 공립이건 상관없이, 그냥 초등학교 1학년 아래 공교육으로 수용하는 겁니다. 젊은 세대가 목숨 걸고 도전하는 교직도 늘어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겠죠.


    저는 교육전문가도 아닙니다. 수백수천 시간을 고민하고 연구한 바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학교에서,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1학년 국어 수업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자인 우리글, 한글을 가르치지 않는 현실은 외면하고, "헐, ㅋㅋ"라고 쓰는 대화로 하루 종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내버려둔 채, 한글만을 쓰는 것이 맞느니 한자를 병행하거나 혼용하는 것이 옳다느니 하는 싸움을 보면서 매우 유감스러웠기에 몇 자 적었습니다.


(표지 사진은 imbc.com에서 퍼 왔습니다.)



아래는 같은 매거진, "뜰 앞에서"의 이전 글입니다.

https://brunch.co.kr/@69010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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