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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도밤 Feb 16. 2024

서주연/정기선(2023), 조선의 글 쓰는 여자들

늘 그곳에 있었던 보편에 대하여


p.47 어린 딸이 예뻐 어쩔 줄을 모르는 아버지 마음.

p.50 그 딸아이를 다 키워 시집보내고 빈방에 앉으니 줄줄이 이어지는 걱정.  <교녀가>

p.90 ‘신여성’의 시대, 서울 유학 간 남편을 기다리다 무식해서 이혼 당한 '보통 여성'의 삶. <시골여자 설운 사연>

p.129 전차가 다니고 동물원이 들어선 한양을 보며 읊는 찬탄의 노랫말. <한양성중요람>

p.206 시집을 가면 부모는 친정에서 부르던 이름 대신 시집 간 댁의 성씨를 붙여 '○실이'로 부름. 권씨네 시집 갔으면 권실이.

p.212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희생'이 강요된 불평등한 삶 (…) 그러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서 역할을 어떻게 더 잘 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규방가사 속 여성들의 모습을 주체적 삶이 아니었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p.234 “온전한 이름 석자를 전하기보다 치열하고 뜨겁게 살아낸 자신의 삶을 전하고자 했던, 평범했지만 비범한 여성들의 삶”



내가 알던 규방가사란 꽃피는 봄에 임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누구, 네 번이나 남편을 잃고도 살아내었던 누구의 노래 같은 것들이었다.


이 책은 규방가사의 세계가 알려진 것보다 넓고 깊고 길었음을, 노랫말에는 여성들의 삶이 굽이굽이 담겨 있었음을 소개해 준다.


가사를 읽다 보면 저자들이 왜 이 삶의 이야기들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을지 느껴진다.


노랫말에는 보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

삶이 외롭고 버겁고 서글퍼 절망하다가도,

주어진 생을 어떻게든 살아내리라는 다짐 같은 것.


좋은 딸이자 며느리이자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는 것이 자기 앞의 생이라면,

일평생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 역시 충분히 정성스러운 삶이다.


시집 간 딸의 자취가 아직 남은 방에 앉아,깨워야 일어나는 그 잠을 어쩌나, 유난이 탔던 그 겁을 어쩌나..



우리는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에 눈길을 보낸다.


1900년대 초라면 으레, 화려한 경성 거리, 높게 솟은 백화점과, 양산 쓰는 모던걸과, 다방에서 팔던 칼피스 따위를 떠올리곤 한다.

물밀듯이 쏟아진 새것들이 헌것들을 일순간 덮어버린 양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화려한 도시를 벗어나면, 부모와 그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가 살았던 방식 그대로,

옷과 밥을 짓고 밭을 갈고 삶을 일구던 보편의 삶들이 여전히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전통적인 문학 양식이 지고 ‘신소설’이니 <무정>이니에서 ‘근대적 문체’를 일군 과정이 현대문학사의 첫 페이지를 채우지만,


옛소설을 읽고, 가사를 지어 부르고, ‘밧바 이만 총총..’하며 한글 편지를 썼던 이들 역시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이 책은 모두가 새로움을 주목하던 때 늘 그곳에 있었던 보편의 삶에 눈돌리게 한다.


세상 많은 것들은 그리 빠르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균형 있는 시간 감각이 조선 말기라는 뒤섞임의 시대를 더 정확히 보고 읽도록 해 줄 것이다.




저자는 한양도성과 내방가사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추진하여 성공시킨 남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쉽게 해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은 그 자체로 나만의 이야기가 된다.

기회가 된다면 그 특별한 경험에 대해서도 책이나 글로 읽어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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