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도밤 Mar 13. 2024

펠로우십 소개 받기, 마음 먹기

일렁임과 무서움과 게으름 사이에서의 한 달

대학원에 들어온 후부터 항상, 누군가의 도움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처음 입학해서는 바로 위 선배를 졸졸 쫓아다니며 스터디와 학회에 나갔고, 어깨너머 본 것들을 따라해 보며 새로움을 조금씩 익혀 나갔다.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내가 특히 재밌어 하고 마음 쏟는 분야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학계(學界)에서 선망하고 닮고 싶은 연구자들도 눈에 보였다.

내가 마음 쏟는 분야를 먼저 연구하고 발자취를 남긴 사람, 눈이 번쩍 뜨이고 배움이 되는 연구를 먼저 한 사람, 나도 언젠가 꼭 이런 연구를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자극을 주는 선배 연구자.


내게 그런 존재였던 분께 펠로우십을 소개 받았다.



원체 고민이 많은 나는 내 연구에 대한 고민과 답답함의 시기가 꽤 길었다.

사람이 쓰는 언어는 사람이 사는 삶과 사람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한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는 나는 언어가 변화하는 과정에 삶과 문화의 요인을 더 적극적으로 연결해 보고 싶었다. 에스키모 언어에 눈을 표현하는 단어가 수십 개라는 진부한 얘기 말고, 조금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그러나 내 관심사가 하나의 연구 분야나 관점으로 발전될 수 있는지 확신이 없었고,

내가 접하고 읽는 국어학의 테두리 안에서 참고하거나 기댈 땅도 잘 찾아지지 않았다.



고민이 길어지던 시기에, 내가 오래 선망했던 선배 연구자와 인연이 닿은 건 기쁨이자 행운이었다.

이전에 한번 학술대회에서 토론을 맡아 주셨기에 내 관심사를 알고 있었고, 작년 초부터 같은 학회에서 일을 하게 되어 내 고민을 나눌 기회도 있었다.


그분은 10여 년 전 미국 모 대학의 모 연구소에서 펠로우십을 했었다. 이후 계속 그 연구소의 메일링을 받고 있었는데, 언어인류학 펠로우십 모집 공고가 나자 감사하게도 나를 떠올려 주신 것이다.


메일을 전달 받았을 때는 직장에서 맡았던 가장 큰 행사를 앞둔 시점이었다.

그분은 메일에 이번 펠로우십 프로그램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썼다.

또 펠로우십을 여는 교수가 언어와 문화의 관계를 공부하는 나에게 '아주 좋은 가이드'가 되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눈코 뜰 새 없던 어느 날에 받은, 짧은 메일에 포함된 두 번의 '아주 좋은'이 마음에 작은 불꽃을 피웠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 아주 좋은 기회라고 기쁘게 소개해 준 일.

어쩌면 오랜 내 고민이 풀려나갈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하루종일 마음에서 일렁였다.


좁디 좁은 식견을 가진 나에게 미국은 달처럼 느껴지는 땅이었고 인류학은 접해본 적도 없는 학문이었다.

모든 것에 확신이 없어서 지원을 고민하는 데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그러나 항공료에 체류비까지 제공한다는 이 기회를 지원도 않고 떠나 보내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일이었다.

내 연구에 확신이 없어 놓치고 말았던, 놓침에 대한 후회로 나에 대한 믿음을 더 깎아냈던 지나간 기회들이 떠올랐다.


일렁임과 무서움과 게으름 어느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직장 생활과 바쁨을 핑계로 하루하루를 덧없이 보냈다.

마감일을 2주 앞두고, 더는 미룰 수 없었던 시점에서야 겨우 결심이 섰다.

여전히 확신은 없었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서류를 준비할 물리적 시간이 안 되었기에, 머리가 아니라 손이 대신 결단을 내려 줬다.


첫 삽은 그렇게 떠 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국어사 전공자의 미국 유학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