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도밤 Apr 03. 2024

졸업 계획서와 CV와 추천서

부족하고 엉성한 생각을 모아, 여러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모아

지난주 대학 동기들끼리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대학원을 안 간 친구가 석사 과정 중인 다른 친구에게 논문 주제가 무엇인지 물었다가 된통 한소리를 들었다.

대학원생에게 졸업 논문 주제를 묻는 것은 설날에 삼촌이 결혼 언제 하냐고 묻는 것과 똑같다나.


석사 졸업할, 박사 졸업할 학년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논문 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공부를 쌓는 위인도 있겠지만, 나처럼 야트막한 아이디어와 소망을 이리저리 굴려 가며, 때때로 소논문이나 발표하고 위안을 삼으며 박사 과정을 버티는 범인(凡人)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믿고 싶다)


펠로우십을 '지원'하겠다고 마음 먹는 데 한 달이나 걸린 것은 '지원'을 위해 '졸업 계획서'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학들에서 어떤 서류를 요구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경우는 박사논문 개요와 구체적인 플랜을 포함한 연구계획서, 한국어로 '이력서'라 불리는 CV, 그리고 두 명에게 받은 추천서가 필요했다.


졸업 계획서를 받는 것은 펠로우십 모집 대상이 박사 졸업을 막 했거나, 박사 졸업을 곧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사 졸업을 '곧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정체를 들키면 안 됐다. 이 펠로우십만 받는다면 곧바로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전도유망한 예비 박사인 것처럼 보여야 했다.


내 박사논문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에 한 달 동안 지원을 해도 되는지 정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인데, 마감일이 다가오니 별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박사논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뭐..


용기를 얻었던 것은 나의 은인, 나에게 이 펠로우십을 추천해 주신 교수님께서 자신의 연구계획서를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에 나와 같은 자리를 지원할 때, 그 분이 딱 나처럼 막연한 소망을 이리저리 굴리는 박사과정이었을 때 쓴 계획서였다.


난 그분의 박사논문을 알고 그 이후의 연구를 알고 지금 그분이 하는 연구의 공력을 안다.

하지만 그분이 '나 때' 쓰셨다는 그 계획서는 그 모든 길의 첫 단추에 놓인, 날것의 모습이었다. 딱 맞는 연구방법과 적절한 관점, 색다른 통찰이 얹어지기 이전, 아직은 어색하고 덜 다듬어진 모습이었다.


이 분도 처음엔 그랬구나, 나도 지금 이렇게 보이겠지만 언젠가 저 분처럼 될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위안과 용기를 얻으며 어떻게든 일단 시작했다.

촉박한 일정 중에 어떻게든 글을 완성해 낸, 사실 방법이랄 것도 없는 나의 방법은 이러했다.



## 글감 모아 붙이기


우선 내가 썼던 소논문들과 굴려 왔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적었다. 생각을 모으는 데는 늘 내가 사용하는 Dynalist를 사용했다.

역시 나의 은인인, 내가 참 존경하는 어느 선배가 석사과정을 막 입학한 내게 소개해 주었던 도구인데, 나는 늘 여기다가 읽은 논문도 정리하고 연구거리도 정리하고 아이디어도 모아 놓곤 한다.


https://dynalist.io/why

이 도구의 장점이 궁금하시면 여기저기 잘 써 있으니 찾아보시길..


일단 한글로, 해왔던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과 그럴 듯해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모으고 붙였다. 지원하는 분야의 논문과 책들을 읽으며 내 관점과의 연결고리를 찾았다. 막연하게 굴려 왔던 생각들이 제목과 분류 안에서 자기 자리를 잡아 갔다. 순서를 바꾸고 모아서 나름의 체계를 잡고, 생각나는 것들을 더 채워 넣으며 헐렁하게나마 틀거리를 만들었다.



# GPT와 함께 영작을


나름의 체계가 잡힌 뒤에는 그냥 영어로 썼다. 한글로 글을 완전히 완성한 뒤에 영어로 고치면 영어다운 글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말 안되는 문법과 영어사전을 뒤적거린 단어들을 엮어서 그냥 썼다. 영작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에 한 문장 한 문단 이어 나갈 때마다 Chat GPT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사실 이번 기회로 GPT님의 능력을 새삼 알게 되었는데, AI의 능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족하게라도 무언가 만들어놓으면 거기에 톡! 마법을 부려서(?) 굉장히 그럴듯하고 좋은 결과로 바꾸어주는 것에 있었다.


GPT는 나의 부족한 어휘력과 영어사전이 채워줄 수 없는 뉘앙스를 메꾸어 주었고,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읽어서 꽤 괜찮은 키워드를 제안해 주기도 했다. 좋은 키워드를 제안 받으면 거기서부터 또 문장들이 떠올랐다. 떠오른 문장을 다시 점검받고, 고쳐서 한 번 더 돌려보았다. GPT가 없는 시대였다면 나는 정말로 글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글로 대충 떠오르는 걸 모아서 틀거리를 잡았다. 틀이 잡혔다고 느껴진 뒤부터는 그냥 영어로 썼다.


학업계획서에는 박사논문 개요뿐 아니라 내가 왜 이 펠로우십에 지원했고, 내가 지금까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연구 성과를 쌓아 왔는지, 나에게 이 기회가 왜 필요하며, 이 기회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썼다. 서류 중 나에 대해 알릴 수 있는 글이 연구계획서밖에 없었기에 한 예비 학자로서 내가 이 펠로우십에 대해 갖는 기대와 나라는 사람의 진정성을 여기서 표현해야 했다. 엉성할 게 분명한 박사논문 개요보다는 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고 고치는 데에 더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 고치고 고치고 계속 고치기


GPT를 다 믿을 수 없었기에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받았다. 성격상 평소에 남에게 부탁하는 일이 절대 없는데 이번만큼은 생각나는 대로 모두 부탁했다. 우선 은인 교수님이 외국인 지인을 거쳐 지원서를 꼼꼼히 읽어 주셨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친구에게도 부탁했다. 예전에 여행하다 만난, 인류학을 전공했다고 들은 것 같은 원어민 친구에게도 부탁했다. 숨고에서 소일거리로 영어 번역이나 감수를 하는 어느 준전문가에게도 의뢰했다.


여러 사람이 더 좋은 표현을 추천해 주고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도 달아주었다. 그렇게 여러 번 다시 글을 읽고 고치고 다시 쓰며 엉성했던 생각들도 조금씩 더 논리를 갖추어 갔다. 고마운 마음을 모으고 모아, 지원 직전까지도 점(.)과 선(-)을 더하고 빼 가며 어떤 계획서를 결국 완성했다.




비록 당장 박사 논문 집필을 시작할 능력은 갖추지 못한 나지만, 계획서를 쓰는 과정 자체가 머지않아 완성할 박사 논문을 위해 한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지원서를 완성하고 나서는 이것이 나에게 합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해도 충분히 귀하고 고마운 경험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두 장의 추천서는 지도교수님과 은인 교수님께 받았다. 나에 대해 그동안 가져 오셨던 믿음과 감사한 기대를 벅차게 받았다. 그 정성을 글로 읽는 것만으로 나라는 사람이 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 또한 결과와 상관 없는, 언젠가 갚아야 할 은혜이자 고마운 마음으로 남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퇴고를 거듭하다가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제출을 눌렀다. 다음 단계가 또 있는지, 무엇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모두 아는 게 없었지만, 어쨌든 지원은 마친 것이니 후련했다. 과정 덕분에 알게 된 고마운 마음들을 모아서 소중히 담아 놓고, 나의 일상을 계속 살아갔다.



매거진의 이전글 펠로우십 소개 받기, 마음 먹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