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 시간

삼땡, 나의 이야기 1화

by 삼땡

1월 29일.

새해가 시작된 달이지만, 이제 끝이 보이는 달.


한 달 내내 영하권에서 도무지 올라올 생각이 없는 겨울의 밤이었다.

술집들이 줄지어 붙어 있는 오래된 상가 건물.

그 건물의 가게들이 함께 쓰는 화장실, 차갑게 식은 변기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두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양손을 깍지 껴 코앞에 붙인 채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깊다기보다는, 생각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쪽에 가까웠다.


김치찌개 소짜 이만삼천 원.

계란말이 만삼천 원.

공기밥 두 개 이천 원.

음료수 하나 이천 원.


도합 사만 원.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 날 예정되어 있는 친동생 둘과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아마 그날은 이보다 조금 더 나올 것이다.

술을 조금 덜 마신다고 해도, 계산대 앞에서 숨이 막히는 건 비슷할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8시 44분이었다.

7년을 만난 여자친구와 허름한 김치찌개 집에서 저녁을 먹던 시간.


그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을 가지고 있었다.

긴장하거나, 불안해지거나, 혹은 아무 이유 없이도 배는 제멋대로 아파왔다.

오늘도 그랬다.

여자친구와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들다 말고,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 들어왔다.


서른셋.

삼땡.

이제 서른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


무직.


이렇다 할 경력도, 눈에 띄는 스펙도 없었다.

뉴스에서 말하는 ‘그냥 쉬었음 청년’이라는 표현이 있다면,

그는 그 말의 안쪽에 정확히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데이트 비용도 없었다.

자기 이름으로 된 통장에는 몇 만 원조차 없었다.

서른셋의 그는, 아직 엄마 카드를 썼다.




여자친구는 그보다 네 살이 많았다.

이미 노산이라는 말이 따라붙는 나이에 들어섰고,

더 늦기 전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도 그러고 싶었다.

아니, 정말 그러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하면 확신은 흐려졌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여자친구가 행복하길 바랐다.


아직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도, 잘하는 일도,

꿈이나 삶의 의미 같은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잠시 내려놓고,

여자친구를 위해, 여자친구의 시간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게 꿈이라는 말은 어쩐지 웃겼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진짜 꿈처럼 보였다.


문제는, 선뜻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조금 더 어렸을 때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금방 자리 잡을게. 내가 행복하게 해줄게.”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하지만 길어지는 공백기 앞에서

그는 그런 말 한 마디를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부모님은 여유가 있었다.

자식들이 노후를 걱정해주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엄마는 부담 갖지 말라며 카드를 내밀었다.


대학생 때라면 아무 생각 없이 긁었을 카드였다.

하지만 서른셋의 그는,

그 카드가 꽤 무거웠다.

친구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엄마 카드 쓰자.

그리고 얼른 자리 잡아서 용돈 드리자.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변기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문을 열고 김치찌개 집으로 들어가자,

여자친구는 이미 외투를 입고 가방까지 챙긴 채 서 있었다.


“얼른 가자. 버스 시간 다 됐어.”


그는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 앞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순간, 여자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계산 다 했다이!”


티 없이 맑은 웃음과 함께

그 말은 가볍게 떨어졌는데,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친구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길,

지하철역 앞 공터에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연기가 올라가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같은 생각들이 반복됐다.


나는 데이트 비용도 없어서

7년을 만난 여자친구 밥 한 끼도

내 돈으로 사주지 못하고

엄마 카드로 계산할까 고민하고

결국은 여자친구한테 얻어 먹고


얼른 자리 잡아서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그는 괜히 휴대폰으로 해외 팝송들을 찾아 들었다.

가사가 무슨 뜻인지는 잘 몰랐다.

그냥 아련해 보이는 노래면 충분했다.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도.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취업 어플을 켰다.

자격 요건, 지원률,

다른 사람들의 스펙과 자격증, 토익 점수들.

몇 번을 스크롤 하다, 그는 결국 어플을 껐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지금이 가장 어린 나이라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시작점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어느 빌라의 복도에서 센서등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센서가 고장 나 1초 간격으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불빛.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그 불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생산성이 곧 삶의 가치로 환산되는 이 시대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그의 삶은

고장 난 센서등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돈을 버는 데 실패한 것일 뿐이지,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니라고.


지금 당장 못 버는 것일 뿐,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라고.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원룸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달라질지 알 수 없는 내일을 생각하며,

그는 잠에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 카드로 긁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내일은 배가 아프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