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수한다. 비로소 ‘나 자신’이 보인다.
오늘도 손톱을 뜯어본다. '아, 불안한데... 아, 실수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들로 내가 어지럽혀진다. 치열했던 취준생 시절, 내 손은 말 그대로 아작이 나있었다. 어릴 적부터 습관처럼 뜯기 시작한 이후로 무언가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손을 뜯곤 했으니까. 독서실에 앉아 회사생활을 꿈꿔보다가도,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내일 보는 시험에 또 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이 나를 잠식해버렸다. 한 문제만 떨어져도 불합격이란 문구를 보게 되는 공기업 시험, NCS궐기대회를 하루 앞둔 나에게 '실수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입사 후 내 손은, 여느 청춘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네일아트로 단정히 손질된 '섬섬옥수'가 될 줄 알았던 것이 가장 큰 착각이었다. 회사 생활은 말 그대로 총성 없는 전쟁터였달까. 마치 벌거벗은 채로 전장에 뛰어든 꼴이었다. 처음 하는 업무에 알고 있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채로 맞닥뜨리니, 실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작은 실수 하나가 큰 재앙으로 되어버릴까 봐, 불안하고 또 불안해서 실수를 없애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 같다. 회사 매뉴얼과 규정에 집착했고, 사수가 일을 알려줄 때는 말씀하시는 한 문장을 혹시나 놓칠까 봐 속기사처럼 수첩에 줄줄 대사를 써놓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역시나 실수하고 또 실수했다. '이제 좀 괜찮겠지'하고 방심하다 보면 어느새 지뢰처럼 놓여있다가 터지곤 하는 그런 일들이 나를 더욱 겁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그 시작이 나의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퇴근길 자괴감에 빠져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내 모습이 너무 끔찍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어느 날, 나는 이제 더 이상 당당하던 내가 아니라 실수에 전전긍긍하고 매사에 방어적인 모드가 장착된 최고의 겁쟁이가 되어버렸다.
영화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게 아니야, 실수가 널 만들지. 실수는 널 더 똑똑하게 하고, 널 더 강하게 하고, 널 더 자립적으로 만들지
이 장면에서 나는 펑펑 울어버렸다. 그동안 하지도 않을 실수에, 혹은 작은 실수에도 나 스스로를 책망하기에 급급했던 나 자신에게 너무나 미안해져 버렸으니까. 고작 실수 하나를 해결하지 못할 만큼, 나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 작은 그릇인가? 나는 실수가 두렵고 무섭다. 잘못될까 봐, 무서운 일이 생겨버릴까 봐, 지레짐작하고 겁먹은 채로 도망쳐 버리고만 싶다. 사서 걱정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영화 속 저 대사가 그래서 내게 유독 울림이 크다. 사실 이 세상에 두려워할 것은 따지고 보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언제까지고 다가오지도 않을 것을 걱정만 하며 살 수는 없다. 말 그대로 실수는 나를 만들고, 또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어이지 않을까.
실수가 어떻게 발전되는지는 정말 나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실수했으면 인정하고 다시 도전하고, 해보면 되니까. 그리고 또 혹여 내가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스스로를 너무 책망하지 않아야 한다. 나 스스로 으쌰 으쌰 해줘도 모자랄 판국에 혼내기만 하면 내가 너무 짠하니까 말이다. 오히려 내게 “아자아자! 기죽지 말자!”를 외쳐줘야겠다. 실수는 피하는 것이 아니라 가이드북 없는 인생에서 내게 정답을 알려주는 유일한 길이니까, 더 이상 겁내지 말아야겠다.
오늘 하루가 지나면 더더욱 실수가 두렵지 않기를, 그래서 퇴근길 내 걸음에 당당함이 묻어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