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아이러니, 연대

#8

by 송생님


뭇 대학생들이 그러하듯 배낭여행으로 유럽여행을 떠났다. 같이 간 친구와의 대화 소재가 고갈될 때쯤 한국인 동행을 구해서 구시가지 광장에서 맥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그렇게 모인 여행자 열명 남짓.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지, 지나온 길에선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등을 얘기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 여행지는 포르투갈이라며 풀어놓던 여행기 덕분에 지금까지도 나는 포트루갈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다. 별 계획이 없던 이들은 다음날 여행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우리 또한 일찍 자려던 계획을 미루고, 공원에 앉아 맥주를 한잔 더 마셨다. 돌바닥에 앉아 마시던 체코 흑맥주와 자유의 맛은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어제까지는 몰랐고, 지나고 보니 이제는 더더욱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들과 그때 그 밤,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깊은 대화를 했다. 인생을 돌아보니 나에게도 그런 인연이 있었고, 그런 시간이 있었다.


누구를 만나도 친해지는 데에 사계절이 필요한 나로서는 어릴 때 그렇게 여행지에서 사람을 사귀던 모습이 또 다른 나를 보는 거 같아서 재미있는 부분이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내 안에 두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 생각하며 사는 편인데 이상하게 여행지에서는 그러한 기준들이 자꾸 깨진다. 낯선 이의 내일을, 미래를 응원하게 되고, 그의 지나온 삶에 흥미롭게 귀을 기울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후기와 최적의 루트를 생각하며 여행을 떠난 내가 결코 나답지 않은 그 시간들이 여행의 매력인지도.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것들에서 잠시 벗어나 헤픈 연대를 꿈꿔보는 것이 내가 실로 바라던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 사람이랑 여행가면 싸우지 않을까를 골똘히 고민하면서 떠난 여행에서 우리 내일 같이 프라하성 갈래요? 를 쉽게 뱉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니까.


최근에 읽은 시대예보라는 책에서는 '과잉 시뮬레이션'을 언급한다. 어떤 정보든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시대에서 과도하게 효율적인 길만을 탐색하면서 되려 인간의 사고방식이 단순해지고, 원하던 최적의 결과를 낳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개념이다. 과잉 시뮬레이션이란 쉽게 말해 내가 만일 ~한다면 어땠을까에 대해서 유튜브, 블로그, 생성형AI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결과값을 예상해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삶의 불안정성을 최소화하고, 계획한 바대로 흘러가는 인생을 꿈꾼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스펙을 나열해놓고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을까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이정도면 성공한 삶인가요? 를 끊임없이 물어보며 삶을 증명하고, 확인받고자 하는 욕망은 강해진다. 그러나 이는 타인으로부터 아무리 확인을 받아도 안심할 수 없는 허울뿐인 증명이다.


현대사회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라는 것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정언명령같은 것이다. 내가 스스로 겪어보고 판단하지 않으면 절대적인 행복에 도달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잉 시뮬레이션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을 수차례 돌려도 결코 편안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결과에 대한 예측보다는 삶에서 펼쳐지는 우연을 기대하며 때때로 나답지 않은 아이러니를 범하고 결코 무너지지 않는 연대의 힘을 믿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우연한 동행을 기대하고 평소같지 않은 사교성을 보이며 다음날을 함께 그려보던 어릴 때의 그 여행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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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전 프라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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