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6
다른 건 몰라도 호치민에 있는 동안 한국을 가장 많이 다녀온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작년에는 4월, 8월, 12월에 한국을 다녀왔고, 올해는 1월, 4월, 7~8월에 벌써 세 번이나 한국에 다녀왔다. 베트남에 오면 동남아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돈을 쓰게 될 줄 알았는데 웬걸 한국행 항공료를 모으면 유럽여행도 다녀왔을 것이다. 베트남 생활이 그리도 좋다고 얘기하고 다니지만 사실은 한국에 가면 더 좋다.
가장 사소하고도 크게 느껴지는 건 발에 닿는 평평한 길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당연한 듯 깔려있는 보도블록에 감사해 본 적이 없었다. 호치민에선 보도블록이 부서진 채로 방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오토바이가 인도까지 올라와있어서 일자로 쭉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거진 차도뿐이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갈지자로 타도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는 폭이 넓은 인도에 속이 뻥 뚫린다. 한국도 폭염이라 날은 덥지만 더운 날을 하염없이 걸으며 평평한 길을 실컷 누렸다. 알고리즘에 따르면 발 아치가 무너져서 종아리가 두꺼워진다던데, 아치의 힘을 온전히 느끼면서 걷는 건강한 걸음이 얼마나 소중하던지. 친구를 만나 밥을 먹고 카페는 좀 멀리 있는 곳으로 갈까?라는 물음에 좀 더운데, 그래도 걷자라고 말해주는 산책 동행이 있어서 얼마나 행복하던지. 사람들은 바닥이 당연히 평평한 줄만 안다. 구멍 난 보도블록을 메우는 일도, 넓고 쾌적한 인도도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한국에 와서 겉면이 살짝 벌어져버린 노트북을 수리했다. 노트북을 맡긴 지 다음날이 되어도 연락이 없자 노트북을 오늘 좀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자 기사님께 곧바로 전화가 왔다. 제가 지금 이동 중이라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어서 전화를 하는데요, 그게 다 순서가 있는 거라 그렇게 바꿀 수가 없는 거예요. 어딘가 성이 난 거 같은 말투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니 다음날 받기로 하였다. 약속한 시간은 내가 집에 있는 두 시 반부터 네시반 사이-언제 그곳을 배달할지 모르니 정확한 시간은 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 시 반부터 전화가 오더니 두시 십이 분에 도착하면 받으실 수 없으세요?라고 말하는 그. 그래서 부리나케 집으로 출발했으나 서울의 교통체증 탓에 두시 십이 분까진 도착할 수 없었다. 기사는 또 다음 배달까지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계속 나를 재촉하고, 나는 차가 꽉 막혀있는 도로를 재촉하고. 그래 이게 한국이지. 오랜만에 느끼는 숨 막히는 타임어택. 베트남에 있을 때는 시간 약속이 잘 안 지켜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다 내가 시간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해해도 그들 또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시간에 대해 느슨해진 감각이 좀 편했던 거 같기도 한데, 글쎄 뭐가 맞는지는 모를 일이다.
한국에 올 때면 친구들을 만나서 반갑게 대화를 하곤 한다. 내 또래의 최대 관심사는 결혼과 육아다. 임신한 친구는 곧 만날 아이에 대해, 기혼자는 임신에 대해, 미혼자는 결혼에 대해 그렇게 늘 다가올 미래는 우리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그러나 각자의 타임라인이 달라진 만큼 모두가 관심을 갖는 주제로 얘기가 모아지기는 어렵다. 나도 결혼을 하지 않은, 그러나 결혼생각이 있는 30대로서 결혼 얘기는 늘 흥미롭지만 남들과 굳이 나누고 싶지 않은 얘기기도 하다. 가급적이면 누군가가 불편해질 만한 주제는 꺼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요즘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뭘 먹는지, 뭘 좋아하는지, 인생은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런 얘기나 하루 종일 하고 싶다. 한참 배우자의 조건에 대한 토론을 듣다가 문득 그래 이게 우리 또래들의 흔한 고민이었지. 베트남에서는 너무 잊고 살았네.라는 딴생각에 빠진다. 매일 건강한 음식을 먹고, 테니스를 치고, 마사지를 받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에 대해 떠드느라 바빴다. 해야 할 숙제를 유예하고 논 사람처럼 일종의 죄책감 따위를 느끼며 집에 돌아가는 길은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그 숙제를 착실히 해나가는 친구들 또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여기 이곳에서는 누가 행복할 수 있는 걸까. 나이 들수록 친구가 적어지는 것은 이런 작은 그릇 탓인가 보다. 그래도 그 작은 그릇에는 삶이 결코 돈이나 결혼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나의 확고한 생각이 들어있다.
최근 베트남에서의 하늘이 너무 예뻐서 종종 사진 찍어 올리기도 하며 푸르른 하늘을 자랑하곤 했다. 한 차례 폭우가 지나간 한국의 하늘은 더 뜨겁고 맑고 청량하다. 푸르른 하늘이 달처럼 내 곁을 따라 옮겨오는 기분을 느낀다. 어디서 살든, 어디가 더 좋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푸르른 하늘이 나를 따라왔듯 내가 택한 삶과 삶마다 늘 맑고 푸르길 바라본다.
한국의 여름이 그래도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