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한국에 와서 무엇이 제일 좋았냐는 친구들의 물음에 나는 '겨울'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그 더운 곳에서 내가 2년을 살았는지는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다. 한국에 도착했던 1월은 보통의 겨울날씨보다도 훨씬 추운 밤이었다. 그곳에서 캐리어를 끌고 주차장을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신나서 뛰었다. 추운 날씨가 너무 반가웠다. 땀한방울마저 말려버리는 건조함과 머리카락 한올한올 사이로 느껴지는 차가운 바람, 청량한 공기까지. 한파주의보가 아무래도 폭우주의보나 폭염경보보다는 낫다는 소신발언.
겨울을 좋아하는 이들은 다양한 이유가 있다. 스키, 스케이트와 같은 겨울 스포츠를 좋아해서이기도 하고 붕어빵이나 어묵 같은 겨울 간식 때문이기도 하다. 혹은 따뜻한 전기장판 위에서 귤을 까먹을 수 있다는 작은 행복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에 크게 해당사항이 없지만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우선 이번 겨울엔 눈이 올 때 좋아하는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책을 읽던 날이 좋았다. 찬 겨울이 아니고서는 절대 따뜻한 음료를 마시지 않기 때문에 그 낯설고 생경한 느낌이 좋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다른 계절보다 차분한 분위기에 무엇을 해도 집중이 잘 된다.
눈이 그친 날엔 한강을 뛸 수 있어서 좋았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미세먼지 없이 멀리까지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나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었다. 사람들이 많이 없는 산책로는 뛰기에 좋고, 실컷 뛰고 왔는데도 땀이 나지 않아서 상쾌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는 장소는 으레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점으로 정해지기 쉽다. 으으-하면서 패딩을 여미고 들어오는 친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너 아직도 베트남 사람이야?, 이 날씨 코트를 누가 입어, 따뜻하게 입어야지. 꽁꽁 싸맨 겉옷 위로 오가는 투박한 안부인사는 왠지 더 따뜻하다. 동그란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 소회를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 마치 어묵국물에 빠진 길쭉한 어묵 같다. 길거리의 모습은 또 어떤가. 여름의 어느 날보다 찰싹 붙어 길을 걷는 연인들, 터질듯 빨개진 볼따구의 아기들, 감기를 면해보겠다고 장갑과 모자, 귀마개로 소중하게 스스로를 감싸고 다니는 사람들.
겨울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봄이 온다는 사실도 좋다. 봄은 지금도 부지런히 오고 있다. 따뜻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따뜻함으로. 푸른색으로. 싱그러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