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직장인에게는 '369 증후군'이 있다고 한다. 1분기 단위로 업무 수행 평가와 실적 결산이 이뤄지는 직장문화에서 비롯되어 3,6,9개월 단위로 직장인이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진다는 신조어다. 혹자는 3,6,9년마다 겪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언제든 빠지기 쉬운 무기력증을 00 증후군으로 이름 붙여서 이겨내보고자 하는 직장인들의 눈물겨운 사투인 듯하다.
어릴 적엔 꿈이 일 년에 한 번씩, 아니 한 달에 한 번씩은 바뀌었다. 기억나는 시점부터는 변호사, CEO, 문구점 사장님, 광고기획자 등등이 있었으나 교사가 꿈이었던 적은 없었다. 스무 살 때까지 문과는 경영학과 아니겠냐며, 그중 좀 더 멋져 보이는 호텔경영학과를 갈지 아니면 캠퍼스가 좀 더 예쁜 학교를 갈지 고민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수능이 끝나고 그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의 친구가 교대를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난 재수생이었으므로) 교대를 가야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다른 부모님들은 교대를 가겠다고 하면 좋아한다던데, 꿈 많던 우리 엄마는 딸이 스무 살 때부터 진로가 정해지는 길을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때 엄마 눈에 나는 변호사면서 CEO면서 사장님이면서 기획자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새싹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충동적으로 진로를 선택하게 된 것에 비해 대학시절은 꽤 의미 있었다. 밴드 동아리도 하고, 과학생회도 하고, 열정페이였던 교육봉사 기획단도 하였다. 주말엔 남는 시간이 아까워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본 덕에 '인간군상'을 몸으로 배웠다. 교사가 되어보니 그 모든 경험은 아이들에게 얘기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사가 되는 길은 내 예상보다 멀리 있었다. 두 번째 임용시험을 낙방할 때는 재수가 팔자인가 싶어 눈물도 안 났다. 간절히 바라지 않은 꿈이라 쉽게 이뤄주지 않는 건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세 번째 시험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한 사립초등학교 채용공고에 홀린 듯이 지원을 했다. 뭐라도 시켜주면 열심히 하고 싶다는 마음에 1년짜리 기간제와 정교사를 둘 다 지원했는데, 교감선생님께서 훗날 그런 지원자는 처음 봤다고 하였다. '교사'를 간절히 꿈꾸지는 않았지만 무엇 하나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삶은 없었다.
그렇게 코로나로 전국이 초비상이던 시국에 나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열정 넘치는 신규였던 나에게 미뤄지는 개학은 슬픈 소식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 학교는 실시간 온라인 수업으로 개학하기로 특단의 조치를 내리게 된다. 그렇게 2학년 30명의 첫 제자들과 작은 화면으로 만났던 것이 교직생활의 첫 기억이다. 매일같이 일절의 학습공백 없이 실시간 수업이 진행되었다. 9살이 음소거와 채팅을 혼자 쓸리 없고, 90명 정도의 엄마, 아빠 내지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수업했다. '이런 수업을 도대체 어떻게 해?'라는 것도 잠시 학생들도, 나도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학생들 중 절반정도는 출석하고, 나머지 절반은 화상채팅으로 참여한 상태에서 수업을 하는 말도 안 되는 '하이브리드' 수업도 2년 가까이했었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카메라를 들고나가 자신의 집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갓난애 기인 동생을 화면에 보여주며 자랑했다. 학교에 있던 젊은 교사들은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교내 구원투수로 투입되었고 나는 내 몫을 다 해낼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그렇게 신규생활을 보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의 말이다. 인생에 목적지를 정하고 달리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달리면 체력이 좋아진다. 좋아진 체력으로 목적이 생겼을 때 비로소 방향을 잡으면 된다. 그렇게 무엇이든 내게 주어진 기회를 열심히 잡으며 살다 보며 꿈꾸던 삶인지는 몰라도 후회하지 않으며 살 수는 있다. 그래서 나에게 369 증후군은 오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새롭게 닥치는 상황이 힘들었지만 행복했다. 그러다가 만 3년 차 모든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 수업준비를 하지 않아도 수업을 할 수 있었고, 대본까지 써놓고 받던 상담 전화를 이제는 능청스레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상은 아픔 없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한마디로 먹고살만해진 것이다. 이대로만 살면 죽을 때까지 불행하지 않은 보통의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동시에 삶이 너무 무기력하고, 사람들도 쉽게 싫어졌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었다.
죽을 때까지 불행하지 않은 보통의 삶, 그것이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될 순 없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죽을 듯 애쓰는 고통과 자람은 없을 거 같았다. 그 어떤 표피의 벗겨짐과 나이테의 축적도 없이 고생해 본 적 없는 떡잎의 상태로 지내다가 가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일까? 어느 날은 회사원 친구를 앉혀두고 술 한 방울 없이 한참을 독백했다. 난 요즘 통증 없는 삶을 사는 거 같아. 지금이 너무 편안한데, 행복하지 않아. 뭐가 부족한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힘들고 싶진 않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아니 혹시 의미 있는 일이라면 힘들어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해. 친구가 나를 어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에겐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 동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다시 인생에서 굳이 안 해도 되는 일들을 찾아 나섰다. 승진할 꿈은 없었지만 굳이 비싼 대학원을 가고, 굳이 연구회를 하겠다고 열어서 고생을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학교도 오고,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 길 위에서 마주한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는 안다.
인생에 쓸모없는 경험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
꿈은 정해진 종착점이 아니라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꿈은 꾸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