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저작권」

레시피는 없지만 이야기는 있다

by 루틴의 온도

냉장고 속에서 꺼낸 일상의 조각, 이야기로 익어가는 삶의 풍경


냉장고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오래된 양배추와 반쯤 남은 당근, 그리고 엄마의 손길을 닮은 장조림 통이다. 이건 분명 내가 만든 요리다. 하지만 재료 하나하나를 손질할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은 엄마이고, 남편이고, 어느 저녁의 내 모습이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 요리는 정말 내 것일까?”

블로그에 나의 요리를 기록하며 살고 있다. 토마토 스튜, 계란 팬케이크, 볶은 당근과 마녀수프. 나만의 방식으로 재료를 섞고, 글을 쓰고, 사진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법적으로 레시피는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쓴 이 기록들은… 누군가 가져가도 되는 걸까?


나는 블로그에 요리를 기록한다. 단지 조리법을 적는 게 아니라, 그날의 날씨, 재료를 고를 때의 기분, 남편과 나눈 짧은 대화 같은 것들을 함께 담는다. 요리는 그저 핑계일 뿐이고, 기록이야말로 내가 글을 쓰는 진짜 이유다.

가끔 생각한다. 누군가 내 레시피를 그대로 가져가도 괜찮을까? 사진까지 가져가면? 내 문장을 복사해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퍼가면?

그래서 찾아봤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레시피는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정량, 순서, 시간처럼 조리법은 단순한 '사실'이나 '아이디어'로 분류된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고,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 하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 않을까?

내가 적은 문장들, 내가 찍은 사진들, 내가 겪은 감정들은 ‘그냥 조리법’이 아니지 않나. 법은 그렇게 말하진 않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저 요리일 뿐인데, 누가 먼저 했는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나에게는 그 '먼저'가 중요하다. 그날의 감정, 조리 중 흘러나온 말들, 그리고 실패했던 맛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건 단순한 조리법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이 응축된 표현이다. 그리고 표현이 있다면, 그걸 지킬 수 있는 권리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리를 기록하기 시작한 건 냉동실 한켠, 오래된 밤 한 봉지를 꺼내면서부터였다. 그날 나는 무심히 밤을 꺼내 찌고, 조리고, 그 과정을 사진으로 찍으며 글을 썼다. 그렇게 '밤 조림'은 첫 번째 기록이 되었고, 요리와 감정, 그리고 나의 내면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요리는 나에게 단순한 끼니 해결을 넘어, 기억을 꺼내고 감정을 정리하며, 일상을 복리처럼 쌓아가는 하나의 방식이 되었다.


엄마는 장조림 레시피를 따로 남기지 않으셨다. 그저 고기 삶는 냄새가 퍼지면 주방으로 불려 들어가 간장을 조금 붓고, 참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이 정도면 돼” 하셨다. 나는 그 기억을 더듬으며 요리를 흉내 낸다. 고기의 결을 손끝으로 느끼고, 간장의 색을 눈으로 가늠하고, 엄마처럼 대충 하지만 결코 대충이 아닌 방식으로.

레시피는 없지만, 나는 엄마의 요리를 이어받았고, 이제는 내 방식으로 조금씩 바꾸어가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시간을 품은 기억이고, 조용히 쌓여가는 하나의 이야기다. 그리고 나는 그 서사를 매일 조금씩 써 내려간다. 마치 복리처럼. 오늘도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맛으로.


기록은 복리처럼 쌓이고, 삶의 조각은 저작권처럼 지켜낸다. 그래서 요리는 오늘도, 어제의 연장선이다. 같은 재료라도 날마다 맛이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계절 따라 손맛이 바뀐다. 나는 그 변화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글로, 사진으로, 냉장고 속 작은 통들로. 어떤 날은 별것 아닌 듯한 기록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를 가장 단단하게 붙잡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요리는 나에게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자, 행복을 담는 그릇이다. 허기를 채우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식탁 위에서 소소한 웃음과 대화를 이끌어낸다. 예전의 나는 요리에 서툴렀고, 실패도 많았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시도하고, 쌓아가면서 요리의 즐거움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이제야 진심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요리도, 감정도, 삶도 매일 조금씩 쌓이면 결국 이야기가 된다고. 사람 마음도 한 겹 한 겹 쌓여간다면, 내가 쓴 이 문장들도 언젠가 나를 지켜주는 벽이 될 수 있을까.


저작권은 거창한 제도가 아니라, 내가 삶에서 길어 올린 작은 표현들을 내 것이라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울타리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냉장고를 열고, 오래된 양배추와 반쯤 남은 당근을 꺼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만의 맛을 만든다. 이 조용한 반복이 언젠가, 나를 닮은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루틴의 온도라는 이름으로, 삶의 조용한 반복을 글로 요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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