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싸는 또 다른 나, 베로니카
《관능, 그것은 나의 언어였다》
관능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어떤 오해가 따라붙는다.
너무 육체적이거나, 너무 외설적이거나, 혹은 너무 쉬운 감각의 언어라고.
하지만 어느 토요일 밤,
한때 내 서랍 속에 있던 VHS 영화 한 편을 떠올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관능은 시선에서 시작되지만, 감정에서 완성된다.
어떤 손길은 닿지 않아도 뜨겁고,
어떤 목소리는 말이 없어도 울린다.
그리고 어떤 얼굴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깊은 곳을 건드린다.
이 시리즈는 그런 감정들의 기록이다.
육체에서 시작해, 감정과 영혼으로 흐르는 관능의 궤적.
그날의 영화들과, 그날의 떨림들을 나는 여기에 적어두기로 했다.
이것은 나의 감각의 기록이자,
관능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랑하게 된 밤의 이야기들이다.
어느 밤, 나는 한 여자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울고 싶어졌다.
슬퍼서가 아니었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니, 너무 조용한 아름다움이 내 안의 무언가를 울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이렌느 야곱.
그리고 그 영화는,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다.
우리는 흔히 관능을 육체의 것이라 말한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촉, 시선의 교차, 노출과 접촉의 미학.
Ep.1에서는 《애마부인》, 《Two Moon Junction》, 《Betty Blue》를 통해
강렬하고 솔직한 욕망의 형상을 들여다보았고,
Ep.2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미장센 속에서
응시와 억제, 감정의 응어리가 만들어낸 긴장감을 느꼈으며,
Ep.3에서는 《피아노》 속 침묵과 음악의 언어를 따라가며
우리가 말하지 않고도 건네는 영혼의 떨림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앞에 선다.
그 어떤 키스도, 사랑도, 섹스도 없는 이 영화에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깊은 관능을 느낀다.
이 영화의 핵심은 하나의 존재가 두 명으로 태어났다는 설정이다.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끄.
둘은 서로를 알지 못하지만, 서로를 느낀다.
한 명이 심장마비로 죽는 순간, 다른 한 명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삶의 방향을 바꾼다. 설명되지 않는 공명.
감정의 관능과 영혼의 관능이 겹쳐지는 지점.
그 틈에서 나는 관능의 마지막 형태를 발견했다.
이것은 육체의 자극이 아니다.
감정의 교류를 넘어선다.
이것은 존재의 울림이다.
이렌느 야곱은 대사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녀는 말보다 눈으로 이야기하고,
손보다 얼굴로 감정을 건넨다.
그녀의 눈빛은 카메라 렌즈를 통과해 관객의 심장을 흔든다.
가만히 있는 얼굴인데, 마음이 울린다.
그것이 관능이 아니면, 무엇이 관능일까.
우리는 가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조차 모르는 내 감정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그런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닮은 두 사람. 닿지 않지만 연결된 운명.
사라졌지만 남겨진 감정.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관능은 반드시 누군가를 끌어안아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능은,
어디선가 나를 감싸 안고 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
그 울림만으로도 완성된다는 것을.
《관능은 울림이었다》
처음엔 육체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살결, 격렬한 숨소리, 시선의 정직함.
그다음엔 감정이었다.
감춰진 사랑, 삼킨 말, 응시와 침묵이 만든 간극.
그리고 마지막엔,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관능은 어떤 울림의 형태로 내 안에 스며든다는 것을.
이렌느 야곱을 통해,
나는 관능이 육체나 사랑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의 매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네 편의 시리즈를 연재하며, 나는,
관능이 결국 나 자신을 다시 만나는 과정이었다는 걸 고백하게 된다.
그 밤들 속, 나는
단 한 편의 영화로도 충분히 사랑받았고,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흔들렸다.
이미지 출처: 창작 일러스트 (비상업적 감성 콘텐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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