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해파랑길 16코스에 있는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24시간 찜질방 특성상 어쩔 수 없이 남녀들이 한방에 모여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 가족끼리, 부부끼리, 연인끼리, 친구끼리 많이 와서 찜질 및 하룻밤을 보내고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이 되자 지옥이 시작되었다. 특히 나는 잠을 잘 때 귀가 예민한 편이어서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도 깨는 편인데 남성분들의 코 고는 소리는 검은 하늘에 천둥이 여러 번 치는 듯해서 공포감과 어마어마한 소리의 울림이 나의 잠을 방해했다. 어떻게든 귀를 막아도 잠들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1~2시간뿐만 잠을 자고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운 다음날, 6시 20분쯤에 가방을 챙기고 나가야만 했다.
개인적으로 잠을 깊게 자지는 못하면 스트레스가 쉽게 쌓인다. 나는 내 몸을 알고 있었다. 또 하나, 2025년 12월 21일은 20일의 따뜻한 날씨와는 너무나도 다르게 바람이 세차게 불고 추웠다. 하지만 절대로 짜증을 내거나, 조그만 일에 토라지거나,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엄마와 나는 새벽 6시 20분에 나왔지만 밖은 20일 토요일 저녁 6시처럼 어두컴컴했기 때문이었다. 컴컴하면 이상하게 두려움이 몰려와서 이 어둠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공포감이 먼저 다가온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감정적인 것보다 이성적이게 된다. 물론 엄청난 두려움의 감정으로 가득 차있지만.
2025년 12월 21일 일요일 새벽, 해파랑길 16코스 중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만 걸으면 16코스가 끝나고 15코스로 진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6코스를 걸으면서 '주의구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것을 엄마께 알려드렸다. 해파랑길 16코스 중 하선대 및 선바우, 흰디기 등 지질자원을 경유하는 해안둘레길 데크 개선 공사가 2026년 1월 24일까지 진행되어 해당구간 통행이 불가하다는 문구를 두루누리 앱에서 몇 번이나 확인했고, 약 1시간 동안은 찻길로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에는 버스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앱에서는 위험하니 가급적 대중교통 등 차량을 이용하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이때까지 해파랑길을 쭉 경험해 본 이상 거의 드문드문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대신 '차라리 걷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께서는 일단 최대한 찻길로 걸어야만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껌껌한 새벽, 아무도 없는 차만 5분마다 한 대씩 지나가는 그 찻길을 1시간 이상 걷는다는 것은 우리 모녀에게는 불길한 마음을 안겨다 주었지만 '살기 위해서 한다.'라는 문장이 떠올라지는 순간 피곤함, 추움, 무서움은 금세 사라지고 걷는 데에 집중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오직 걷기만 했다. 더 힘든 점은 이 날 날씨도 흐려서 해가 뜨는 시간도 지체되는 듯했다. 겨우 7시쯤 되었을까. 그때 돼서야 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하지만 구름에 가려져서 그런지 해가 뜨고 있는지 벌써 떴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해가 떴나 보다. 날씨가 흐려서 해가 떠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세상 시야가 조금씩 넓게 보이기 시작했다. 역방향으로 해파랑길을 걷고 있고 조금만 더 있으면 16코스 기점이면서 15코스 종점이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드디어, 우리 모녀는 포항에 CU 편의점 포항흥환해변점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16코스를 무사히 마무리를 할 수 있었다.
15코스는 안타깝게도 호미곶 근처가 아니면 식당이 거의 없기 때문에 종점에서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만 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일반김밥, 삼각김밥, 옥수수수프, 바나나 우유, 커피를 한껏 먹었다. 다행히도 배가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지쳐 있었는데 힘을 내서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파랑길 15코스, 길이 13km, 소요시간 약 5시간, 난이도 보통이다. 정방향이라면 호미곶등대 -> 대동배 2리 마을 -> 대동배교회 -> 구룡소 -> 흥환보건소까지 주요 지점을 거쳐갈 수 있다. 호미곶에서 출발하여 대보저수지와 동호사, 임도사거리를 거쳐서 흥환보건소에 이르는 구간이지만 그것을 역방향으로 우리 모녀는 걸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탓일까. 이번에 걷는 곳의 50% 이상은 해변길 중에서도 자갈길을 걸어야만 했고, 그 자갈길은 온통 쓰레기로 덮여있었다. 인상이 찌푸려졌고,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일찍 이 길을 만나서 화가 덜 났지만 말이다.
자갈길을 걷다 보면 땅이 꺼지는 느낌이다. 기분이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다. 신발을 등산용으로 두꺼운 것을 신었지만 발바닥, 다리, 무릎에도 영향이 많이 갔다. 도착은 할 수 있을까? 길이가 13km이고 소요시간이 5시간이지만, 체감상으로는 길이도 길고 소요시간이 5시간보다도 더 걸릴 듯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등산코스도 2번이나 있어서 산을 타야 하는 경험도 해야만 했다.
8코스 이후로 산을 타본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참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2025년 첫겨울산을 탔다. 확실히 겨울산은 여름에 탔던 산의 느낌과 매우 달랐다. 곧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그야말로 보통의 차가움을 넘어선다.
개인적으로 겨울은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름산과 다르게 겨울산은 매력이 있었다. 여름처럼 각종 벌레가 꼬이고 푹푹 찌고 후덥찌근한 느낌은 없는 것, 올라가다가 힘들면 땀이 나는데 바로 찬바람으로 식힐 수 있다는 것, 겨울에 산을 타면 평소보다는 별로 추위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름산을 탔던 것과 다르게 겨울산의 매력을 확 느껴버린 나는 추위의 고통을 유유히 넘기는 방법으로는 '겨울산 타기'가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산을 두 번 정도 탄 것 같았다. 쉬운 산인 줄 알았지만 하산, 즉 내려올 때는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위험했다. 예전에 하산할 때 몇 번 삐끗해서 다리에 심한 무리가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해야만 했다. 다리와 무릎, 그리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1박 2일 동안 걷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마지막 산을 내려오고, 자갈해변도 끝이 났다.
이제 그다음은 호미곶항까지 가는 길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바람이 내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댔다. 평탄한 길이 나와서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불행이 다시 엄습해 왔다. 엄청난 추운 바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해파랑길 13코스에서 찬바람으로 온몸이 간지러워서 심하게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떠올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몸에 바디로션도 듬뿍 바르고 왔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다만 모자를 써도 모자가 금방 날아갈 정도의 추위는 눈을 찌푸리게 했다. 귀도 너무 차가워서 찢어질 듯한 고통을 주웠다. 귀를 가릴 모자를 다음에는 꼭 챙겨 오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이 힘듦은 계속해서 더해지기 시작했다. 이유는 같이 잘 다니고 있는 엄마의 투덜거림 때문이었다.
최근에 엄마께서는 무릎과 허리도 좋지 않으셨는데 그것 때문인지 걷기를 하면서 내내 쉴 틈 없이 혼잣말을 하셨다. 힘들다는 하소연이었다. 일정시간이 지나자 분명 조금씩 무릎에 무리가 오셨을 것이다. 특히 이번 코스에서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하시고, 해변에서도 자갈길을 걸으셨으니 오죽 고통스러우셨을까. 솔직하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코스마다 목적지에 도착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포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되도록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정자나 벤치가 나올 때마다 잠깐씩이라도 앉아서 쉬는 타임을 가지고 걷고 또 앉아서 쉬고 걷고를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조금씩 호미곶항 근처에서 사진을 찍거나 산책을 하고 있는 가족, 연인, 친구들이 보였다. 백만 년 만에 사람들의 얼굴들을 본 것 같았다. 반가웠다. 갈매기들도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곧 호미곶에 도착한다는 생각이 드니 우리 집에 갈 수 있는 버스도 곧 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1~2시간 만에 호미곶 근처에 도착을 했다. 나도 그리고 엄마의 얼굴도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호미곶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것으로 이번의 해파랑길 1박 2일 15~16코스를 마무리했다.
해파랑길을 할 때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인생에서 크게 해내야 할 숙제를 해결할 때와의 느낌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힘든 것을, 그 고통을 유유히 견뎌내는 것이다. 그냥 고통을 회피하는 것도, 재빨리 털어버리는 것도 아닌 가만히 지켜보고 내버려 두고 감당하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든 버텨내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요즘 들어서 드는 감정인데 나와 타인의 아픔을 어떻게든 견딜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자꾸만 든다. 특히 이번 해파랑길 여행도 그랬다.
고통을 가볍게 넘기는 여유는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지만 사실 쉽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이 능력을 가지려면 시간이 무한히 많아야 한다. 또한 인생의 배움의 시간도 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으로 다양한 고통을 맛보고 즐겨봐야 한다. 그 고통은 쓴맛이지만 끝에는 달콤함이 꼭 찾아온다. 그 경험을 수천번 수만 번 이상 했을 때는 마음의 여유가 넘칠 것이다.
언제부턴가 나도 또 고통이 다가올 때 '이것 또한 지나가니까.' 하면서 유유히 넘길 수 있는 지혜가 생겼다. 다음에는 어떤 경험이 깃든 고통이 찾아올까. 때로는 어떤 것에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욱하는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이것 또한 지나가니까. 그리고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늘 행복만 있겠어.' 어쨌든 한 번의 고통으로 여러 가지의 인생의 깨달음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