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16코스, 불안한 게 오히려 편하다

빛이 거의 없는 어두운 세상에서 잠시 머물 때

by youlive

2025년 12월 20일 토요일, 오랜만에 겨울에 몹시 따뜻한 날을 맞이했다.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을 때 맛보는 유일한 따뜻함을 선물로 받은 느낌일정도로. 엄마와 함께 집밖으로 나간다. 따뜻한 공기에 몸이 녹아지면 풀어지는 날이다. 내가 사는 곳에서 해파랑길까지는 15코스 기점보다는 16코스 종점이 1시간이나 더 가까워서 16코스 종점에서 시작하여 역방향으로 15코스 기점까지 걷기로 결정을 했다. 포항 호미곶에서 상생의 손을 멍하게 쳐다본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순간 설레었다. 또다시 걷고 싶었다.


해파랑길 16코스, 길이 19km, 소요시간 약 6시간 30분, 난이도 보통. 정방향으로는 흥환보건소 -> 연오랑세오녀테마공원 -> 도구해변 -> 포스코역사박물관 -> 송도해변이다. 처음으로 역방향을 도전하게 되었다. 길이가 만만치 않은 코스이지만 별생각 없이 시작한다. 한 달 만에 다시 걷게 되었고, 그것도 날씨가 좋을 때 걷게 되었으니, 걸을 때 장거리여도 상관이 없다. 이번 16코스는 철강회사 포스코와 현대제철을 지나는 코스로 포항의 주요 산업시설과 동해바다가 조화롭게 이뤄지는 구간이다.





이번 코스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한다. 드디어 우리 모녀가 당일치기가 아닌 1박 2일을 하는 날이 다가온 것이다. 언제부턴가 코스를 하나하나씩 이룰 때마다 마음은 충족되지만 '집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서 집 밖에 나가서 대중교통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포항부터는 하루를 당일치기를 해도 본가에 늦게 도착을 하는 일이 잦았다. 엄마와 내가 이야기를 하면서 고민을 한 끝에 이제부터는 1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포항 15코스부터는 무조건 1박을 해야 조금 더 비용적으로, 시간적으로, 체력적으로 더 좋을 것 같았다.


'송도해변'에 도착했다. 아, 기분 좋은 마음으로 '평화의 여상' 앞에서 해파랑길 시작점을 알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날은 입고 있는 패딩을 벗어야만 할 정도로 더웠다. 걸으면서 우리 모녀는 '포스코'와 '포스코대교'를 지나가며, 포항 산업의 위대한 정신을, 그리고 아름다움을 한번 들여다봤다. 한국의 철강산업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고 싶으면 이곳을 걸으면 된다. 거대함에 나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코 담을 수 없어 아쉽지만 작은 것이라도 담고 싶어서 폰 카메라를 여러 번 켜면서 수시로 사진도 찍어 남겼다.



얼마나 정처 없이 걸었을까. 나는 오늘 무엇도 바라는 것이 없이 걷고 있었다. 뭔가를 바라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마음은 참으로 인생에서 가장 편한 순간이다. 나는 무슨 순간이 와도 최대한 당황스럽지 않게 행동하려고 한다. 물론 두루누비 앱에 있는 따라가기와 해파랑길 여행자를 위한 해파랑길 표시띠와 안전한 길 확보가 우리의 마음을 더 편하게 해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주신 분들께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놀라운 경험은 여러 번 지속되었다. 이름 모를 바다에 도착했는데 카메라 블러(흐림) 필터기능이 필요 없는 순간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날은 기온이 19도까지 올라가면서도 곧 비가 내릴 정도로 약간 흐렸다. 햇빛은 나는 흐린 하늘.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완전히 블러필터로 만들었다. 어느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해변벤치가 있어서 앉아서 잠시 쉬고 있는데 블러필터가 낀 것 같은, 바다가 청량한 하늘색처럼 보이는 것 같은, 그 순간을 보았다. 바다가 연한 하늘색이라니 그 모습이 아름다워서 감탄을 했다.


그리고 해변가 옆 우드데크 둘레길을 걸으면서 이곳이 '도구해변'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구해변에서의 뿌연 공기들로 인한 하늘과 땅이 블러 필터링된 세상을 보고 걷고, 또다시 쉬고, 다시 걷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노을이 지는 듯 세상이 조금씩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해는 어느덧 우리 모녀에게 잘 가라고 인사라도 하는 듯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구나.'를 알기도 힘들게 서서히.



얼마나 걸었을까. 신라시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의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으로 도착했다. 테마공원까지 오니 점점 더 어두컴컴해지자 배가 고프기 시작했고, 근처 칼국수 집에서 한 끼를 때웠다. 바지락 칼국수를 먹으니 배도 가득 차지고 따뜻해지면서 잠도 살살 오는 듯했다. 저녁시간이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걸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약 10분 정도 걸으면 '포항불가마 24시 찜질방'이 나오기 때문에 칼국수 식당에서 좀 쉬다 나왔다. 그날은 그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후 6시 정도에 밖으로 나오니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다. 어두컴컴한 정도보다 더 어둡게 말이다. 하지만 10분만 걸으면 찜질방이 나온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마트폰 두루누리 GPS앱을 켜고, 조명등도 켰다. 해변길로 가라고 길을 가리키고 있어서 그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어떻게든 찻길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욕심, 식당에서 좀 쉬었던 욕심이 도리어 화를 불렀던 것인가. 두루누리 앱으로 16코스를 보았을 때는 바다 근처로 걷는 길이 맞아서 찻길이 아닌 그 길로 걸으려고 해서 갔더니 계단이 나왔다. 시골 쪽이고 가로등이 없다 보니 어두컴컴해서 1m 이상 시야확보가 되지 않았다. 계단으로 살살 내려갔지만 빛이 없는 이 아담한 마을 길이 참 무서웠다. 바다 옆길과 집들이 있는 골목 사이사이가 제일 안전한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닌 순간이었다.


스마트폰 조명도 계속 킨 채로 걷기 시작했지만 시야가 더 크게 확보가 되지 않아서 엄마 스마트폰 조명도 켰다. 긴장을 하면서 걸어서 그런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순간 위에 도로에서 차가 쌩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나 그 차소리가 반갑던지. 껌껌해지면 차라리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찻길 옆에서 걷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휴대폰의 조명을 켜본다. 이것이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약 10분 이상을 헤매다가 도로길이 나오기 전 S자 모양의 오르막길을 걷고 나자마자 드디어 안심의 한숨을 쉬었다. '포항불가마 24시 찜질방' 네온사인 간판이 찻길에 있었던 것이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미스터리한 순간이었다. 평소에는 낮에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차가 갑자기 올까 봐 살살 뛰면서까지 걷는 내가, 왜 어둠 속에서 차가 쌩 달리는 찻길에 의존하면서 걷게 되었는지. 도시의 밤에 외식을 하려고 하면 눈이 따가운 네온사인 간판들을 보면서 '눈부시게 화려해서 뭐가 좋은 거야. 정신 사납기만 하고.'라고 중얼거렸던 내가 어둠 속에 떡하니 있는 찜질방 네온사인 간판을 보고 안심을 하다니 말이다. 나와 엄마는 완전히 긴장이 풀어진 채로 환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찜질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놀랍다. 위험한 순간에도 자연스레 편안해지는 방법만 찾는다면 몇 분 안에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위험한 것도 곧 안전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마법만 부릴 수 있다면 말이다. 그 마법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마음을 바꾸는 마법'일 것이다. '일상생활에도 이 마음이 유지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일상생활은 생각보다 어둠과 불안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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