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코스,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화려함 속에서 느끼는 심심함에 대한 그리움

by youlive

영화를 들여다보면 유독 한 장면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계속 돌려본다. 또 돌려보면서 최근에는 무엇을 해도 경험하지 못한 만족감을 느낀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은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갑자기 일도 끊겨버린 40대 백수다. 그녀는 자신의 이번 현생이 망했다고 느낀다. 어느 날 친한 여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다가 소피의 불어 선생님 '영'을 만난다. 소피의 집에서 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길, 소피의 불어선생님과 같이 퇴근하다가 우연히 술을 같이 마시게 된다. 그때 찬실이와 영은 대화한다.


영 : 동경이야기. 그 영화 봤었는데 조금 지루하더라고요.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요.

찬실 : 뭐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영 : 영화를 좀 심심하게 그리시는 것 같은....


찬실 :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본래 별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오즈 야스지로 감독님이 그런 걸 영화에 다 담으셨잖아요. 영이 씨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여요?


그날, 이 영화에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르겠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꼭 담겨있었기 때문이라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 친구들과 가까운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인간은 늘 재밌고, 신나고, 즐거운 것을 마음껏 간직하고 싶은 욕망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인생 심심하게 살아도 뭐 어떻냐는 말, 진짜 소중한 것은 어쩌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삶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말을 나도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다.


엄마와 나는 2025년 7월 11일 해파랑길 2코스를 걷기를 시작했다. 해파랑길 2코스는 연인들끼리 데이트 코스로, 가족끼리도 갈 만큼 인기가 정말 많은 코스 중에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이유는 부산의 삼포라 불리는 청사포, 미포, 그리고 구덕포를 잇는 기찻길을 걸으면서 바다를 보는데 너무나 아름다워 기쁨의 순간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밖에 송정해변, 해동용궁사, 마지막으로 대변항까지 이르는 길까지 볼거리가 많은 코스라서 심심할 틈도 지루할 틈도 없다.





하지만 기찻길의 아름다운 순간을 즐기는 그 잠시동안 쓸데없는 생각이 또 내 머릿속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기찻길이 끝도 없을 것 같은지 괜히 투덜거리고 싶었나 보다. '예쁘다... 그런데 이제 날도 이제 계속 더워진다던데 이렇게 끝도 없이 걷기만 하면 덥고 지루하고 짜증 나고... 기찻길은 또 언제 끝나는 거야...' 그 순간 찬실이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심심한 게 뭐 어때서요? 본래 별게 아닌 게, 제일 소중한 거예요.


찬실이의 말은 진심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때 순간 잊어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것에 너무 심취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 다시 걷는다. 심심함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제 끝도 없이 심심할 거야.' 2코스는 14km로 난이도도 쉽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아까까지만 해도 헤벌쭉하고 좋다고 다녔던 나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점차 체력이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실 물도 없어지고 있었다. 무겁던 가방은 가벼워졌지만 오히려 마음이 금세 무거워졌다.



해동용궁사가 그렇게 멋있다던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햇빛이 강해지고, 몸이 무겁고, 땀이 계속 흘렀다. 아무 곳에서나 쉬고 싶었다. 화려한 곳이고 예쁜 곳이고 멋있는 곳이고 뭐고 간에 그냥 쉴 곳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뿐이었다. 오아시스처럼 하나 집 같은 게 보인다. 저게 뭐지. 아, 마침 쉴만한 정자가 나왔다. 끝내 엄마와 나는 '살았다!'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동안 쉬어갔다.


계속 해파랑길을 걷다 보면 심심할까 봐 지루할까 봐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 왜냐하면 하루에 적어도 6~7시간을 걷기 때문이다.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시간보다는 말 그대로 '계속 걷는 시간'이 대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자칫 심심하거나 지루할 수도 있다. 시간도 훅 가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밥도 대충 챙겨 먹어야 하고 카페를 들릴 여유도 별로 없다.





더 바랄 것 없는 완벽한 심심함...


그래서 걷다 보면 이 길이 아까 그 길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지금의 바다의 모습이 그전과 다르지 않아 보이고, 인도길이나 찻길이 다 똑같아 보이고, 나무와 숲도 다 여전히 같아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똑같아 보이는 희한한 현상을 겪는다.


그럼 이상하리 마치 심심해진다. '아까 그 길 아니야?'라는 착각도 든다. 걷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전보다는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느낌이 확 온다. 영화 [김씨 표류기]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말하듯이 점차적으로 완벽하게 심심해진다.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이 말이다. 그러다가 종착지에 도착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심심함이 끝난 것이다.


이렇게 심심해도 되는 걸까. 돈 버는 일도 아니고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신나게 이 맛집 저 맛집, 유명한 이 카페 저 카페 찾으러 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냥 걷는 것으로 시작해서 걷는 것으로 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파랑길을 걷는 이유는 너무나도 심심한 게 오히려 즐거워서가 아닐까? 엄마는 벌써 3코스가 어떨지 궁금해하고 계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바닥과 종아리는 무지 아프고 체력도 지칠 때로 지쳤지만 마음은 더 편안해지고 복잡한 내 머릿속이 청소가 되듯이 깨끗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해파랑길이라는 이 심심한 길에 푹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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