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이 단순 도구가 아닌 유일한 수단이 될 때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선정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그저 사고였을 뿐>입니다.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었고, 평론가들의 입소문이 퍼지면서 내년 오스카 강력 후보로까지 떠오르고 있는데요! 시놉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밤중, 만삭의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운전하던 남자는 사고로 차에 이상이 생겨 낯선 정비소에 들어선다. 정비공 바히드는 남자의 의족 소리를 듣고 과거 자신을 고문한 정보관이라 확신하며 그를 납치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은 곧 의심으로 바뀌고 포로가 된 남자의 정체를 확실히 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그들은 억울하게 납치·구금된 소시민들이지만 고문을 당하던 때 모두 안대로 눈을 가린 탓에 누구도 남자의 정체를 단언할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해가는 트라우마의 심연 속에서, 정의와 복수의 경계는 무너지고 감정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전 9월 18일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서 진행된 GV에서 영화도 먼저 만나보고, 파나히 감독님도 영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파나히 감독님께서 부산을 둘러보긴 커녕 수면을 거의 포기하신 채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시고 계셨고, 그와중에도 첫 일정으로 BIFF 공동 창립자이신 김지석 프로그래머님의 묘소를 방문했다고 전해져 얼마나 각별한 사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파나히 감독 하면 영화를 만들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예술활동을 이어나가는 투사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이번 <그저 사고였을 뿐> 역시 공식 허가 없이, 소규모 스태프와 함께 제작되었다고 알려졌습니다. 이는 제작 전반에서 안전과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고. 영화의 시각적 언어는 그런 제약 속에서 빚어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 예로 전담 조명팀을 쓰지 않아 빠르고 조용히 움직일 수 있었고, 모든 조명은 자연광이나 가로등, 자동차 전조등, 형광등 등 이미 현장에 존재하는 빛을 사용했다고 해요. 빛을 ‘만드는’ 대신, 빛을 ‘발견’하고 있었다고 표현할 만큼 카메라 프레이밍이나 촬영 스케줄링까지도 그 순간 주어진 빛의 질에 따라 좌우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영화 속 "리얼리즘"은 단순한 스타일적 선택이 아니라, 제작의 실제 조건 속에서 비롯된 필연이었다고 합니다. 결코 매끄럽거나 연극적인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 장면이 삶이 실제로 펼쳐지는 방식에 최대한 가까워지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파나히 감독이 밝힌 만큼 작품 속에서 그 의도가 완벽히 반영되었는데요.
작품 속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 속 35~40시간 정도의 시간을 다루지만, 실제 촬영은 30일도 채 되지 않았고, 제작 중간 이란 보안군의 제지로 약 20일간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작품의 감정적·시각적 연속성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관건이었다고 하죠.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제작된 탓에 돌리, 크레인, 대규모 조명 장비같은 전문 영화촬영 방식은 프로젝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였기에 배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들은 오히려 창의성과 디테일의 원천이 되었고, 결국 스토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제작 의도와 딱 맞아 떨어지는 적절한 시각적 언어를 낳는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문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고문과 억압이 개인과 공동체의 일상 속에 어떻게 스며드는가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놀라웠던 부분은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다 비주얼로 보여주는게 훨씬 효율적이고 깊은 스토리텔링이라고만 믿어 왔었는데, 이 작품은 그 어떤 플래시백 장면도 없이 단순히 인물들의 감정이 담긴 독백 혹은 상황 묘사만으로 공포감을 조성합니다. 단순한 촬영 및 연출 기법 속에서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최대한으로 이끌어낸 것이죠.
영화 후반부 고정된 카메라와 붉은 조명 아래에서 진행된 10분짜리 롱테이크 장면에선 정적인 연출임에도 굉장한 에너지가 뿜어져나왔고, 이내 소름 돋는 엔딩과 함께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관객으로 하여금 엄청난 여운을 안겨줍니다.
파나히 감독의 다른 작품을 접해보지 못했음에도 이번 작품 하나만으로 왜 그가 거장으로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던 굉장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은데, 10월 1일 전세계 최초 개봉을 앞두고 있는 만큼 꼭 극장에서 경험하시는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