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조용히 내밀어질 다음 손을 기다릴 뿐입니다

by chillingceremonyclub

“날 더운데, 밥은 잘 챙겨먹고 다녀요?”


그날, 부산의 한 오래된 제화 공방에서 들은 첫마디였습니다.

인사라기보다는, 묵묵한 걱정에 가까운 말이었죠.


이름도 모른 채 시작된, 그 말 안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하루였습니다.




칠링세레머니클럽을 시작하던 첫해.


구두를 만들기 위해

부산 곳곳의 공장과 공방을 발품 팔며 다녔습니다.


지도에 나오지 않는 주소,

검색창에선 찾을 수 없는 기술자들의 이름.

우리는 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하루하루 걸었습니다.


KakaoTalk_20250730_150612541_02.jpg 칠링세레머니클럽의 신발이 탄생하는 공장


어느 조용한 오후.

문을 열자마자 퍼지는

묵은 기름 냄새와 가죽의 온기,

그리고 오래된 재봉기에서 번진 열기.


작은 공방 안쪽에선 한 장인이

말없이 구두의 뒤축을 두드리고 계셨습니다.

무게를 덜어내는 마지막 손질.

망치질 하나하나가 공간을 메우며 울렸습니다.


“피곤하죠, 이거 하나 마셔요.”


그분이 건넨 건 비타민 음료 한 병이었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고, 명함도 건네지 않고.

그저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던 손끝에서

우리는 사람을 배웠습니다.




기술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손끝으로 말을 걸어옵니다.


부산은 한때

전국 신발 생산량의 70%를 감당하던 도시였습니다.


연탄으로 본드를 녹이던 소공장,

가죽을 손으로 재단하던 뒷골목,

그리고 툭툭 울리던 재봉기의 리듬.


그 모든 것이 한때 이 도시의 일상이었고,

우리 모두의 과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장인들 역시 대부분 칠순을 넘긴 분들입니다.


우리는 이 변화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물었습니다.


“왜 이런 기술들은 점점 조용해지는 걸까?”




기술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건,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기술은 늘 사람의 손끝에 머물러 있습니다.

스마트화도, AI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을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장인의 공방에서 배운 감각으로

라스트를 수정하고,

토스프링의 각도를 조정하며,

가죽의 텐션을 손으로 느끼며 작업합니다.


이건 단순한 매뉴얼이 아닙니다.

기억의 전수이며, 존경의 반복입니다.




부산은 아직, 기술의 도시입니다


KakaoTalk_20250730_150612541_04.jpg 거의 매일을 방문하는 신발 공장


물론 지금 이곳은

‘인구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젊은 기술자는 점점 줄고,

설비는 낡아가며,

산업은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이곳엔 여전히

정확한 손이 있고,

묵묵한 리듬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제작’이 아니라

‘전승’의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고.



장인의 손길을 기록하고

부산 청년들과 기술을 연결하며

영상과 글, 디지털 툴로 기술을 전하고

다음 세대도 이 감도를 배울 수 있도록


이건 단순히 신발을 팔기 위한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걸어온 이 도시, 이 기술, 이 손끝이

앞으로도 계속 쓰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우리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을 기다립니다



산업은 순환합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만 조용히 내밀어질 다음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이 다시 왔을 때,

기술이 살아 있으려면

지금 누군가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기억을 돕고 싶습니다.




마무리하며



요즘도 우리는 매일같이 공장을 다닙니다.

장인들을 만나고, 그 손끝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명확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그 리듬을 받아 적고,

그 감도를 신발 하나하나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정 속에서 알게 된 건

브랜드의 성장만큼 중요한 건,

그 성장이 누군가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역 안에서

브랜드를 만들고, 기술을 전하고,

작은 생태계를 키워나가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더 많은 공장을 찾아가

대표님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듣고,

사라져가는 기술 속에 남은 철학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싶습니다.


그건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기억의 보존이며, 다음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으니까요.




부산. 그리고 그 안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기술들.

그 안타까움과 책임감이

오늘 이 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당연했던 무언가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걸 느껴본 적이 있다면,

잠시만 그 의미를 되새겨봐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시작일지 모르니까요.


기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조용히, 다음 황금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조용히 기다리며

그 손을 기꺼이 잡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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