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미대생이던 시절, 가난한 동기 남학생은 캔버스 하나로 한 학기를 보냈다. 어쩌다 교수님이 지난번에 그린 그림 좀 보여 달라고 하면 늘 지금 그리고 있는 캔버스를 가리키며 “이 그림 밑에 있어요.”라고 했단다. 이전에 그린 그림을 나이프로 긁어내고 그 위에 새 그림을 덧입히는 과정을 반복하며 한 학기를 지냈던 것이다.
모든 작품을 보관할 수 없어서 종종 잡초 뽑듯이 한 무더기씩 그림을 솎아내야 하는데, 애써 창작한 그림들을 버릴 때는 마음이 늘 복잡하고 씁쓸하다.
그런데 문득 지금의 그림에 지난 모든 그림들이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게 ‘이 그림 밑에’ 있다. 그래서 내 앞에 놓인 캔버스는 늘 오래되고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