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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정은 Aug 18. 2022

흐르는 모래 drifting sand

2012 / 6회 개인전 서문


바람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사막은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자유롭다는 것은 바람에 온 존재를 내맡기는 사막의 모래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놀이터 옆을 지나다가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한 줌 손에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흘려보낸다. 친근한 느낌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릴 때 놀이터에서 온종일 만들고 부수고, 만들고 부수고…… 그렇게 모래놀이에 푹 빠졌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처럼 나는 또 모래놀이를 한다. 

                                     *

언젠가 TV에서 티벳 불교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는 ‘모래 만다라’를 제작하는 것을 보았다. 가느다란 깔대기 모양의 도구에 색모래를 담아서 조금씩 떨어뜨려 만다라를 그리는 장면은 오랫동안 깊은 여운으로 남았다

모래 만다라를 그릴 때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면서 모래의 양과 색깔을 조절해야 하며, 그와 같은 세심한 행동은 그리는 이를 삼매에 들도록 이끈다. 그리고 만다라가 완성되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기도를 하고, 오랜 시간 공들여 그린 만다라를 쓸어버린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만다라를 보며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사실, 즉 ‘무상(無常)’이다. 

티벳 스님들이 수행의 한 방법으로 모래 만다라를 그리는 것처럼,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이든 혹은 그 자체가 목적이든 간에,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흐르는 모래10>   61x41   모래   2012

조화로움, 선명함, 시원함, 홀가분함……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다. 나는 이 단어들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싶지만, 그런 순간은 귀한 손님처럼 아주 가끔씩 찾아올 뿐이다. 

그에 대한 갈증인지, 나는 그림 속에 그런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고, 생생히 살아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소재나 재료를 선택하면 그것을 깊이 들여다보고자 애쓴다. 왜냐하면 대상과 충분히 교감하여 그것과 어울리는 표현 방법을 찾았을 때 그와 같은 느낌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물에는 고유의 빛이 있는 것 같다. 대상을 깊이 들여다보면 처음엔 희미하지만 점차 나를 향해 또렷이 반짝이는 몇 개의 빛을 만날 수 있다. 나의 작업은 그 빛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으며 시작된다.

                                  *

과거가 현재의 조건이 되고 현재가 미래의 조건으로 이어지듯, 그림을 그릴 때도 전에 칠한 색을 통해 지금 색을 선택하고, 지금 긋는 선을 통해 다음 선을 상상한다. 그렇게 그림 속의 수많은 이어짐에 집중하다보면, 어느 틈엔가 점점 선명하게 드러나는 ‘무엇’을 만날 수 있고, 그것을 향해 몰입한 내가 있다.

나는 아주 느리게 그림을 그린다. 찬찬히 소재와 재료를 선택하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지켜보며, 그것들이 한바탕 어우러져 춤추는 것을 바라본다. 일상은 제대로 눈길 한 번 마주칠 사이도 없이 바삐 흘러가버린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 주눅 든 마음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며 위로를 얻는다.  

                                   *

<흐르는 모래12>   46x53   모래   2012

금사, 적사, 산호사, 백사, 흑사... 무언가가 부서지고 부서져서 만들어진 모래의 색은 의외로 다양하고, 따로 물들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참 아름답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처음에는 모래가 가지고 있는 보슬보슬한 감촉에 먼저 눈길이 갔는데, 금세 그 풍부한 색감에도 매료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모래를 만지작거리던 어느 날, 새의 날개 짓이 떠올랐고, 바람이 느껴졌다. 모래로 깃털을 만들고, 가느다란 다리와 뾰족한 부리를 그린다. 바인더를 바르고 모래를 뿌리고, 또 바인더를 바르고 모래를 뿌리며 화면에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면 어느 순간 새가 날고 바람이 부는 공간이 펼쳐진다. 

                                   *

기쁠 때 누군가는 춤을 춘다. 슬플 때 누군가는 노래를 부른다. 지루할 때 누군가는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어떤 감정들은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 가슴 속에 응어리지곤 한다. 

예술적 행위에는 감정과 표현 사이를 선순환 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예술가란 자신과 세상이 가진 체증의 불편함을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끌어내어 승화시키는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보면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감정들과 만나게 된다. 스스로 외면했던 것들도, 무언가에 의해 억눌려져 있던 것들도 하나씩 하나씩 고개를 들며 말을 한다. 그래서 혼자 있지만 너무 소란스러운 시간, 복잡한 나를 보듬고 도닥이며 그림을 그리다보면 점차 마음도 잠잠해지고 손끝도 가벼워진다. 

                                                                    

한때, 예술가란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훌륭한 작품을 위해 매 작업마다 조금씩 나아지기를 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훌륭한 작품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예술가답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가는 대상을 표현함으로써 자아를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예술가가 표현하는 대상이란 예술가 자신과 떨어져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에 스며들어 공명하는 것이다. 세상을 자신의 밖에 있는 배경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어서 나와 세상의 일치를 맛보려는 태도가 바로 예술가답게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지금의 나를 온전히 만나고, 더 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과 같다. 그 여행길에서 나와 세상이 만나서 무한대로 변주 되는 신비를 두려움 없이 즐기고 싶고, 행운처럼 찾아오는 만남들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다.     


<흐르는 모래6>   24x41   아크릴 위에 모래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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