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빌 언덕은 나일지니.
상담은 맑은 물인줄 알고 있던 나의 마음이 사실은 진흙이 가라앉아 잠시 맑아 보였을 뿐이라는걸 깨닫는 활동이라고 쓴 어떤 현자의 글을 인터넷에서 본적이 있다.
상담을 받고 있다.
시작은 부부상담이었으나 2회기 이후 상담사는 개인상담을 요청하였고, 나 먼저 개인상담을 받았다.
너무 바쁜 와중에 상담 예약 확인 문자를 받고서야 상담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퇴근하고 부랴부랴 출장가듯 찾아간 상담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가운도 걸치지 않은 맨살같은 내 마음이 어떠한지 알수있는 징그럽기 만치 정확한 내시경을 받고 돌아왔다.
챕터1. 나는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나는 현대여성이며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며 꽤나 기민하게 나의 상황을 자각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조선시대 여성에게나 쓸법한 "순응"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쩌다 이 결론이 나왔는지,
시작은 동생이었던가, 챗gpt에 나는 왜 맨날 죄송하다고 하는지 물어봤다던 나의 스몰토크에서부터였던가.
아마도 gpt 그 이야기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는 자주 죄송하다고 하게 되는데 그날은 유독 죄송하여 몸이 굽어있었다. 내 스스로가 하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해서 요즘 나의 절친인 gpt에게 물어봤던것인데, 상담사는 그 결론은 나의 순응해오기만한 삶에서 찾았다.
내가 택한 직업이었는지, 엄마에게 떼를 써본적이 있는지, 나의 학교생활은 어떠하였는지.
나는 순순히 순응했다. 적응했고, 말을 잘들었으며 착한 아이였다.
지금도 직장에서 나는 순응하며 왕복 80km도 투덜거리지 않고 출퇴근하는 말 잘듣는 착한 직원이다.
순응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것. 거기에서 시작하여야 했다.
챕터2. 나는 내가 불쌍하다.
나는 순응했지만 피를 나눈 나의 동생,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인 내 동생은 그러하지 않았다.
나랑 세상에서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며 나와 가장 다른 사람인 그녀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녀의 첫 장기기억이 생기게 된 때부터 고집스러웠다. 할머지닙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빠에게도, 선생님에게도, 썅년들에게도.
나는 썅년들에게 썅년이라고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엄마는 "민용이는 학교에서 항상 잘지냈는데 민용이동생은 맨날 싸우고 와. 맨날.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라고 했다. 나의 페르소나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시 나는 그 말이 기분이 아주 좋았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그 생명체만을 위한 멋진 칭찬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인물인 나의 엄마에게 나는 항상 칭찬을 받는 아이였고, 내가 가지게 된 나의 첫 페르소나는 '누구와도 잘 지내는 아이'였다. 그게 좋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이후 나는 남녀노소 어떤 사람과도 갈등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결과 순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반면 동생은 아주 어릴때 부터 치열한 갈등을 해가며 자아를 찾아갔고 본인이 원하는 직업과 본인이 원하는 사람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확신의 결혼을 했다.
나는 그런 동생에 대해 "걔는 지원하는대로 다 했어요"라고 말하며 그에 비해 나는 불쌍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상담사는 질문했다.
"왜? 왜 민용님이 불쌍해요? 직업도 더 좋고 잘 살고 있잖아요."
한번도 그런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너무 이상했다. 낯선 자아을 만난 느낌이었다.
왜, 내가 왜 불쌍하지?
상담사는 말했다. 기본적으로 '연민'이라는 감정에는 '자기애'가 포함되어있다고.
놀라왔다. 그리고 나는 즉각 대답했다. 있다고. 자기애가 있다고.
간지러운데 어디가 간지러운지 모르겠던 곳을 시원하게 긁혀버렸다.
나는 내가 항상 불쌍했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런데 그 시작점은 자기애였다.
나는 내가 과도하게 소중했고 드러나게 인정받고 싶었는데, 거기에서 나는 나의 불쌍함이 시작됐던 것이다.
챕터3.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바빴다고 했다. 너무 바빠서 상담도 잊었다고.
그런데 순응도 해야하고 자기애도 철철 넘치는 와중에 나는 재미있는 것도 중요했다.
항상 재미를 찾았다. 드라마는 끼고 살며, 피아노도 쳐야하고, 그림도 그려야 한다. 심지어 운전할 때는 꼭 오디오북을 듣는다.
그 와중에 애들이랑도 재밌는 추억들 만들고 싶고 수업도 그냥 하기는 싫고 재밌게 해야한다. 고집스럽게 재미를 찾는다.
상담사는 나의 눈을 보며 선생님이 아이에게 말하듯 단호하게 혼냈다. 말했다.
"민용님 꼭 기억하세요. 민용님은 하고 싶은게 많아요."
그 말들이 귀구멍을 통해서 들어와서 신경계가 받아들이는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건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입술을 벌리고 3초 정도 멍하게 상담사를 바라봤다. 신경계가 받아들였으나 해석하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것이다.
상담사는 다시 말했다.
"욕심 많다는 말이 아니에요. 민용님은 그런 사람인거에요. 그걸 받아드려야 해요."
나는 부부상담으로 이 상담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 나는 상담사가 남편과의 갈등의 원인이 나한테 있다고 말하는 줄 알았다. 아마도 부정적인 나의 사고회로가 거기서 끼어든것이리라. 상담사는 정말로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나라는 사람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받아들였다. (순응 잘하니까)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네 정말.
상담사는 말했다.
"하고싶은게 많다는 걸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말해보세요."
질문의 의미가 어떤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상담실은 강제로 부유물을 떠오르게 한다.
강제로 단어들을 부팅시켰고 저절로 답이 나왔다.
"아이요. 하고싶은게 많은 아이."
상담사는 감탄했다.
"너무 좋네요. 아이. 하고싶은게 많은 아이! 민용님에게는 하고 싶은게 많은 아이를 마음에 두고 있어요. 그 아이를 잘 돌봐주세요. 다른 누가 할 수 있지만, 민용님이 하는게 제일 좋아요. 일기를 쓰든, 스스로 말을 하든, 하고 싶은게 많은 아이를 격려하세요. 누르지 말고."
그리고 덧붙였다.
"하고 싶은 걸 꼭 다 하라는게 아니예요. 그 마음을 받아들이라는 거예요."
심리서적에 반복되는 '내 안의 아이'와는 조금 달랐다. 물론 완전히 다른 종류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내 마음에 있는 그 아이는 형용사가 붙어있다. 속성이 있다. "하고싶은 게 많은" 아이. 그래서 나는 이 아이를 내 아이들 돌보듯 잘 돌보려 한다.
상담사는 스몰토크하듯 말했다. 하기 싫어도 습관처럼 순응하면서 살아서 하고 싶은거 많이 못해서 그런 것 같다고. 나는 내가 덜큰게 아니냐며 자조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상담사는 그런 나를 또 달래었다.
이제는 하고 생기거나 불쑥 불쑥 욕심이 올라오면 걔한테 말해주려고 한다.
"하고 싶은거 생겼구나! 왜 하고 싶어 졌을까? 어디서 부터 시작해볼까? 하고 싶은게 많아서 좋구나. 멋져."
오랜만에 일기를 쓰면서 브런치라는 좋은 플랫폼이 있어 좋다.
그 무엇보다 정제된 글을 쓸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
상담은 맑았던 시냇물의 부유물을 꺼내는 과정이고 했던 인터넷 현자는 상담을 하고 온 날은 돌아오는 언덕에서 눈물을 많이 쏟았다고 한다.
나도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가는 언덕을 넘어 상담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오는 길에는 눈물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 상담과정에서 많이 울었다.
왜 우는지 모르겠던 순간도 있었다. 보통은 왜 우는지 잘 알고 우는데 그날은 이상했다.
그러나 끝날 때쯤 알게되었다.
그냥 이런 나를 알아봐주는것, 내 페르소나를 던져도 괜찮다고 나를 그대로 봐라봐주며 나도 그렇게 바라보라고 새 안경을 씌워주는 상담사 때문에 눈물이 났다.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라왔지만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 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나를 사랑으로 키웠지만 순응하는 아이로 만들었고, 나는 그 페르소나에 갇혀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진정한 자아는 그런 내가 불쌍했고 나는 자기애를 건강하게 승화시켜 계속해서 내가 하고싶은걸 하고 살거다.
행복한 날들이 연일 이어지지 않더라도 나는 계속 행복을 꿈꾸며 살 것이다.
그게 나니까.
이슬아 책을 읽고 어반스케치를 하고 근무시간의 8할 이상을 수업 준비에 쏟을 것이다.
그게 나니까.